개막사를 하고 있는 김정일 회장.
9월 14일, 연변정음문화교류중심(이하 교류중심)이 주최하고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민위원회에서 협조한 '항일투쟁의 피어린 발자취를 따라-항전승리 80주년 기념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답사 주제모임'이 길림백천문화미디어유한회사, 연길시황금음악학원, 연변생태문화협회 등 민간문화단체 회원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내두산촌에서 진행되였다.
내두산촌민위원회 전호산 주임에게 족자 '항련의 혼(抗联之魂)'을 증정하는 채영춘(오른쪽) 고문.
교류중심 류영근 부회장의 사회하에 진행된 주제모임에서 김정일 회장이 개막사를 하고 채영춘 고문이 내두산촌에 족자 '항련의 혼(抗联之魂)'을 증정한 후 <장백산 아래 첫 동네와 항일유격근거지>라는 제목으로 주제발언을 하였으며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가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와 항일명장 소개를 중심으로 '항일전쟁승리기념 강좌'를 하였다. 이어 림혜영 고문이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와 내두산 감자에 대한 소감>을 발표하고 전병칠 시인이 현지에서 창작한 시 <감자>를 랑송하였다.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가 '항일전쟁승리기념 강좌'를 하고 있다.
연길시황금음악학원의 가수들이 항일가요 <총동원가>, <유격대행진곡>을 열창하는 것으로 주제모임을 마치고 참가자들은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 기념관’과 ‘내두산항일밀영’안내비, ‘항일장령 동상군’ 등을 참관하고 답사하면서 당년의 항일유격대의 발자취와 이야기를 되새겼다.
연길시황금음악학원의 가수들이 항일가요를 부르고 있다.
이도백하에서 동남쪽으로 25킬로메터 떨어진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는 1935년 11월에 창설되였다. 그해 3월에 왕청현 요영구근거지에서 개최된 회의정신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남만과 북만으로의 원정을 진행하여 더욱 광범한 지역에서 항일유격투쟁을 전개할 준비를 다그쳤다. 이리하여 제2군에서는 적의 통치중심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남만과 가까운 내두산에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할 것을 결정지었다. 그후 10월부터 처창즈에 주둔해 있던 제2군의 부분적인 대오(제2퇀)를 군부와 함께 내두산으로 진군하게 하고 11월에는 병기공장, 옷공장, 병원 등 후방기관들도 내두산으로 전이시켰다.
2018년에 대외에 개방한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 기념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내두산에 도착한 후 낡은 구장제도를 페지하고 농민들 자신의 정권기관인 농민위원회를 설립하고 부녀회, 아동단 등 군중단체들을 조직하였다. 당지의 군중들은 인민혁명군의 지지와 농민위원회의 조직밑에 여러가지 형식의 항일투쟁을 진행하였다.
1936년 1월 22일, 일본침략자들은 송강에 주둔하고 있던 박격포중대와 리도선의 괴뢰치안대 그리고 송강의 경찰부대 등 8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얼어붙은 이도백하를 따라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에 기여들어 근거지를 단꺼번에 도륙내려고 시도하였다.
왕덕태 군장(1907-1936)은 근거지에 있는 200여명의 병력으로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3일간 적들을 저격하였는데 기동령활한 우회작전 등 방식으로 300여명의 적을 소멸하고 대량의 무기를 로획하였으며 적들을 격퇴시키는 쾌거를 거두었다.
‘내두산항일밀영’안내비와 항일장령 동상군 앞에서.
참고로 당시 근거지는 지금의 3촌민소조 부락을 중심으로 하여 건설되였으며 지금의 촌부락은 그후 일본침략자가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한 후 생겨난 마을이다. 왕덕태 군장이 지휘한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 보위전이 있었던 산을 당지 사람들은 지금도 왕덕산이라고 부른다.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상급의 지시에 의해 무송, 몽강, 림강, 장백 일대로 진출하게 되였다. 원래 내두산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와 기관들도 대부대를 따라 남만으로 진군하였다. 이리하여 연변지역에 건립된 최후의 항일유격근거지인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는 자기의 력사적 사명을 완수하였다.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는 비록 4개월여의 시간동안 유지되였지만 항일유격근거지를 리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하던 시기로부터 더욱 간편하고도 엄페적인 밀영을 리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하는 단계로 과도하는 중요한 과업을 완수하였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존재 의의를 가진다.
촌민들과 함께 하는 음식문화체험 한 장면.
이날 참가자들은 “오늘의 행복한 생활은 항일영렬들이 흘린 피와 그들이 바친 보귀한 생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였다고 하면서 항전승리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나날에 일본침략자들과 가렬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에서 당지 주민들이 생산한 광물원소(미량원소)가 풍부한 내두산감자를 맛보면서 환경이 렬악했던 항일유격시절을 돌이키게 되여 더욱 의의가 컸다고 입을 모았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