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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우의 지하교통원 리정옥

주동      발표시간: 2025-09-15 11:34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1933년 9월 18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독립사가 반석현 버리하투(玻璃河套)에서 설립되면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독립사’ 기발은  항일군민들 마음을 격정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최근년간에야 안 일이지만 이 혁명군 기발은 조선족 리정옥 항일녀성혁명가가 버리하투의 6~7명 조선족 부녀회원들과 더불어 밤도와 중문으로 수놓은 기발이였다.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남만 항일무장의 첫 붉은 기발이였다.

남만의 비범한 조선족 항일녀성혁명가이고 후일 비밀전선에서 활동한 항일련군 녀전사인 리정옥(李贞玉,1914.5ㅡ2001.3)은 누구일가? 이를 알자면 그의 남편이고 중공반석림시현위(1930년 6월 설립) 제1임 서기였던 박근수부터 떠올려야 한다.

박근수(朴根洙, 1903ㅡ1970)는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阿吾地)태생이고 화룡현 사광사 삼동포에서 나와 형님 박근성ㅡ박영과 형수 류성희, 셋째형 박근만을 따라 1926년 가을 중국의 광주로 가서 삼형제가 나란히 황포군관학교 교도대에 편입되고 그후 1926년 북벌전쟁과 1927년 12월  광주봉기에 참가한 혁명가이다. 광주봉기에서 맏형 박영을 잃은후 박근수와 셋째형 박근만은 천신만고로 상해에 이르렀고 다시 동북 반석으로 전이하여 박근수가 중공반석림시현위 제1임 서기로 나서게 되였다.

1930년 봄에 박근수는 청원 출신의 조선족처녀 리정옥(李贞玉)과 백년가약을 맺았다. 박근수는 1903년 생이고 리정옥은 1914년 생으로서 나이격차와는 달리  두사람은 너무나 잘 어울리였다.

1930년 8월 하순에 중공반석림시현위는 중공반석현위로 재조직되였다. 신생한 중공반석현위는 설립되면서 중공만주성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현위기관을 반석 양수박자의 박근수 집에 설치하였다.

남편 박근수의 한어소통이 따르지 못하는데서 한족동지들과 접촉할 때면 청원에서 자라 한어대화가 능한 리정옥이 통역으로 나서면서 부딪치는 언어난제를 풀어주었다. 또 동지들이 현위를 찾을 때면 리정옥이 바깥보초를 서면서 현위의 안전을 도모하여 나섰다.

1931년 8월에 중공반석현위는 중공반석중심현위로 개편되면서 남만지구의 당의 지도기관으로 되여 중공만주성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중심현위기관은 반석현 소성자(오늘의 명성진) 서버리하투에 두었다.

1932년 11월경에 양정우가 성위대표로 반석에 와서 늘 버리하투의 박근수 집에 머물렀다. 그때마다 리정옥은 양정우의 화식을 맡아나서면서 양정우의 지하교통원으로 활동하였다.

양정우의 비밀편지라면 한족녀인 변장을 하고 어디든지 떠나갔다. 박근수와 양정우 등이 집에서 회의을 가질 때면 리정옥은 한족습관대로 바늘로 신바닥을 누비거나 닭이나 오리 모이를 주는척하면서 문전보초를 섰다. 양정우와 박근수, 리정옥의 믿음과 동지적 관계는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양정우는 반석의 버리하투에 머무르는 기간 중공반석중심현위를 정돈하고 반석로농의용군을 토대로 중국로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박근수가 참여하였으니, 박근수는 자기의 개략적인 친필자서전에서 “성위순시원 양정우의 지도하에서 중심현위를 개조하고 유격대를 재편성하였다.”고 쓰고있다. 박근수는 반석에서의 양정우의 가장 친밀한 전우이고 유력한 조수였다.

중심현위를 개조하고 반석유격대를 정돈한후  양정우는 잠시 반석을 떠나 해룡 등지 순시길에 오르면서 특별히 박근수와 리정옥을 조용히 만나 자기의 금반지 하나를 선사하면서 그들 부부의 결혼축하선물 겸 조직의 생활보조금이라고 말하였다. 리정옥은 그처럼 험악한 투쟁환경속에서도 양정우가 선물한 금반지를 소중히 건사하면서 양정우를 ‘로양'(老杨)이라고 친절히 부르며 힘을 얻군 하였다.  

/리함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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