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1급 가수 최경호, 틱톡 방송으로 여는‘제2의 무대’

“사실 그 노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불렀어요.”
국가1급 가수 최경호(崔京浩), 그에게 가장 잘 알려진 노래를 꼽으라면 단연 드라마 《우리 아버지, 어머니(咱爸咱妈) 》주제곡인 〈아버지(父亲)〉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이 노래를 이야기하면서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먼저 떠올렸다고 말한다.
1963년 흑룡강성 목단강시 목릉현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여난 최경호는,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당시 39세였던 어머니는 홀로 여섯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떠올렸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모든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을 도맡아 하셨어요. 지붕도 고치시고 닭장도 만들고 돼지도 키우셨어요. 특히, 매년 김치움을 만들 때면 어머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어요. 일을 하시다가 너무 힘들고 애가 나면 옆에 있던 대야의 물을 그냥 자기 몸에 퍼붓군 하셨죠.”
그런 그가 〈아버지〉를 록음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도 어머니였다. “사실 아버지 얼굴도 또렷이 기억나지 않고 아버지와의 추억도 희미해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노래를 부르려니 자꾸 눈물이 났어요. 몇 번이고 록음을 멈춰야 했죠. 아버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없었지만 대신 평생 아버지 몫까지 살아내신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어깨너머로 배운 음악이 내 전부였죠.”
그의 음악 인생은 전문적인 교육보다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되였다.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남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따라하며 독학으로 실력을 키웠다. 소학교 때부터 노래 경연에 자주 참가했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그 순간이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그는 “선생님을 찾아 배운 적도 없어요. 그냥 좋아서 혼자 련습했고 그게 제 전부였죠.”라고 털어 놓았다.
1981년 내몽골 바카투(博克图)부대에 입대한 그는 문예병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내가 노래한다는 소문을 들은 부대 관계자들 덕분에 부대 내에서도 노래 잘하는 팀으로 옮겨 다니며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제대 후 고향인 목릉현문공단에 몸담았고 1987년에는 할빈시조선족예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전국 ‘오주배(五洲杯)’ 청년가수 TV 경연에서 통속부문 3등상을 수상했고 이후 1992년에는 전국 ‘가왕가후(歌王歌后)’ 성악 경연 통속부문 가왕상, 전국‘화흠배(华鑫杯)’성악 경연 통속부문 1등상, 전국 소수민족 성악 경연 통속부문 1등상을 잇달아 휩쓸었다. 1993년부터 중국 대중음악계의 거장인 곡건분(谷建芬) 작곡가를 스승으로 만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창법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 정통은 아닐지 몰라도 오랜 시간 혼자 익히며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변 음악인들의 평가는 다르다. 그의 음색과 리듬감은 매우 독특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음악인은 “저음과 고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리듬감도 타고났다. 노래를 듣는 순간 바로 최경호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특징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이런 독특한 매력으로 그는 드라마 《삼국연의》 삽입곡 〈강상행〉, 《서유기》 속편의 〈통천대로 넓고도 넓네〉(通天大道宽又阔) 등 굵직한 대작 드라마들의 주제곡을 불렀다. 드라마 《삼국연의》는 주제곡만 15곡이였고 그중 3곡이 그의 몫이였다. 그는 “중국의 력사적인 대작 드라마에 조선족인 나를 불러준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였어요. 경쟁도 치렬했기에 자부심도 더욱 컸어요”라고 말했다.
“노래로 받은 사랑, 다음 세대가 꿈을 이루는 데 기여하고 싶어요.”
최경호의 이름 앞에는 ‘가수’라는 직함 외에 ‘애심 활동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이웃과 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96년 첫 개인 콘서트 수익금 전액을 흑룡강성 오상사범학교에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1998년 목단강에서 홍수 의연 공연을 열고 당시 기준으로 적지 않은 200만원을 재해민들에게 기부했다. 2003년 연변에서 ‘사랑으로 가는 길’ 자선공연을 열었고 당시 수익금 전액으로 연변지역에서 도움이 필요한 학생 1,248명을 지원했다. 그 중 215명은 대학 신입생이였다. 그는 “1년만 돕고 그만두면 아이들이 또 학업을 포기할 수 있으니, 졸업할 때까지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했다.”고 터놓았다. 이어 “나중에 사회인이 된 아이들이 직접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하기도 하고 명절이면 그 아이들이 곳곳에서 전화를 걸어온다.”고 전했다. 그의 선행과 예술 활동은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2002년부터 여러 차례 평양 공연을 통해 중조 문화 교류에도 조용히 힘을 보탰다.
틱톡 라이브 방송을 앞두고 장비를 점검하는 최경호 가수
“민족적인 것이 바로 세계적인 것,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어요”
은퇴 후 북경에서 지내던 그가 다시 대중 앞에 선 것은 틱톡(抖音) 라이브 방송을 통해서였다. 주변의 만류도 많았다. “이 나이에 그걸 해서 뭐 하느냐”는 말도 들었단다. 그러나 그는 “어릴 적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하는 것은 노래밖에 없없었다. 내 생명과도 같은 노래를 계속하는 것이 행복하다.”며 장춘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방송을 시작했다.
빡빡한 방송 일정은 그의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목 관리를 하고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줄였어요. 방송을 제대로 하려면 몸이 받쳐줘야 하니까요.”라며 쑥스러운 듯 웃었지만, 그 말 속엔 방송을 대하는 진지함이 배여 있었다. 50~60대 팬들이 주를 이루는 그의 방송은 한 번 시작하면 2시간이 넘도록 자리를 지키는 관객들로 인해 금시 훈훈한 소통의 장이 된다.
앞으로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족의 음식, 례절 등 잊혀 가는 전통 문화를 짧은 영상으로 소개하고 싶다고 전했다. “요즘 조선족 결혼식도 서양식으로 하고 장례식도 간단하게 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내가 큰 영향력은 없어도 ‘민족적인 것이 바로 세계적인 것’이라는 마음으로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꾸준히 알리려 합니다.”
그는 예전의 화려했던 무대와 의연 활동은 모두 “지난 일”이라고 담담하게 선을 그었다. “내 인생의 후반전, 이제는 1년을 하든 2년을 하든 0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도전은 여전히 두렵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부딪쳐 보고 싶습니다.”
/글 오건 기자 사진 정현관 기자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