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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를 밟고 걸으세요

안상근      발표시간: 2025-11-25 15:28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안수복

수술실의 백색 등불과 소독약 냄새가 아직 코끝에 맴도는 듯하다. 

뜻밖의 심한 교통사고로 갈비뼈 8개와 발목뼈 대여섯개가 부러져 골절수술을 받은지 178일 만에 외지팽이에 기대여 처음으로 집 문턱을 넘었다. 다리는 쇠사슬로 묶인 듯 무겁고 발바닥이 닿는 땅은 낯설고도 반가운 촉감이였다. 의사는 단호했다. “걷는 련습도 중요하지만 건강에 필수적인 비타민 D의 주요 공급원인 해빛을 받아야 몸속에 생기가 돌아옵니다.” 생기,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콘크리트 계단은 내게는 만리장성처럼 느껴졌다. 란간의 차가운 금속과 지팽이가 끌어주는 미세한 진동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한 층계, 또 한 층계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땀은 이마를 타고 흘렀고 숨은 가쁘게 몰아쳤다. 6개월 동안 좁은 병실과 거실 창문 너머로만 세계를 바라봤는데 이제야 그 세계 안으로 다시 들어서고 있었다. 

집 뒤로 이어진 200보 남짓한 산책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초여름이라 라일락의 달콤 쌉싸름한 향기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향기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소나무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이 동네에 뿌리 내린지 18년, 그동안 키 작았던 애송이 소나무들은 이제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르는 푸른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으며 당당한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푸르름은 너무나 강렬해 반년 만에 맞는 해살처럼 눈부셨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희열인가? 감개인가? 눈앞의 초록빛이 스멀스멀 번져 마음은 푸른 물결로 잠기게 하는 듯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나무 그늘 아래 화단에는 장미나 함박꽃 같은 꽃들도 한두 송이 피여있지만 산동네 특유의 높은 지세 탓인지 화려한 꽃보다는 조뱅이, 질경이, 민들레, 쑥, 세투리, 능쟁이 같은 풀들이 훨씬 더 기세등등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질경이가 눈에 띄였다. 땅바닥에 바짝 붙어 넓적한 잎사귀를 뻗은 모습이 고단한 삶을 견뎌내는 이 동네 사람들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생명의 신비로 가득차 눈을 뗄 수 없었다.

산책로는 살아 숨 쉬는 풍경화였다. 솔솔 부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정원에 핀 꽃들이 화사한 색으로 반겨주었다. 손을 꼭 잡고 느릿느릿 걷는 로부부의 뒤모습이 따뜻했고 유모차를 밀며 아기를 달래는 할머니의 미소가 평화로웠다. 출근길에 스쳐 지나가는 젊은 부부와 아파트 현관을 쓸다가 반갑게 웃어주는 청소부 아줌마의 인사가 내게도 사람 사는 세상의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동안 나는 바깥세상과 단절되여 있었다.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다시는 내 식당 홀에 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썩은 속을 만들었고 그 쓴맛은 혼자 삼켜야 했다.

“식당집 각시가 걷는구만!”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들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여 들뜬 기운이 감돌았다. 구급차가 열다섯번이나 내 집 앞에 멈춰 섰던 그 정원,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그들은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가?! 그들의 반갑고 걱정섞인 눈빛이 내 발걸음에 힘을 더해주었다. 처음이라 다리는 후들거렸다. 무릎은 버티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지팽이 끝에 온 힘을 실었다. 또박, 또박 땅을 딛는 발자국 소리가 내 귀에 울렸다. 이 소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때였다. 발밑 콘크리트 틈새에서 힘겹게 얼굴을 내민 질경이 한포기가 눈에 들어왔다. 바짝 말라붙은 틈새 흙속에서도 파란 잎을 고집스럽게 펼치고 있었다. 나는 그 우를 지나가려 했다. 내가 내디딘 발아래 질경이의 잎사귀가 찌그러지고 뭉개지는 것이 선연히 느껴졌다. ‘아파하겠구나.’ 지팡이에 체중을 의지하며 되도록 그 작은 생명체를 밟지 않으려 애썼다. 조심스럽게 발을 빼고 한 걸음 더 옆으로 비껴 디뎠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였다. 내가 애써 밟지 않으려 피해 간 자리 뒤로 오히려 그 좁은 틈새들 사이사이에서 수많은 질경이 새싹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파란 작은 잎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나를 밟고 가세요.”

“괜찮아요, 나를 밟고 걸으세요.”

“당신의 길이 되게 해주세요. 꽃길이 되게 해주세요.”

그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듯한 그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발밑의 질경이를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수히 밟히고 짓뭉개져도 기어이 그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화려하지 않다. 보잘 것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땅을 꽉 움켜쥐고 단단히 서 있었다. 한번의 시련, 한번의 밟힘으로 꺾이지 않는 의지의 초록색이였다. 그들은 아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밟힐 때마다 땅속에 더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더 많은 이웃을 불러 모으는 것 같았다.

갑자기 온몸에 뜨거운 무언가가 스멀스멀 퍼져 올랐다. 내 다리의 떨림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 질경이들, 그 보잘 것 없는 풀들이 저토록 강한 것이였다. 교통사고 한번으로 쓰러질 수 없다는게 아니였다. 쓰러져도,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힘이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나도 저 질경이 같은 풀이 되고 싶다.’

생각이 스치자 가슴 한켠에 서린 쓴 맛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내내 식당 문을 닫아야 했던 그날들의 절망, 산더미처럼 쌓인 대부금과 빚의 무게가 여전히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질경이의 파란 잎사귀 앞에서 그 무게가 영원히 가만히 있으라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경이는 한번의 쓰러짐, 한번의 짓밟힘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듯 했다.

나는 지팽이를 다시 단단히 짚고 앞을 향해 또 한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발이 조금 더 단단하게 땅을 감쌌다. 발밑에서 질경이 잎사귀가 살짝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 같으면 마음이 무거워졌을 그 소리가 오늘은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이 질경이가 나에게 건네는 응원의 박수처럼 “괜찮다, 밟고 가라”는 속삭임처럼 들렸다.

인생길이란 본디 평탄하지 않다. 때로는 질경이처럼 땅에 바짝 붙어 밟히는 고통을 견뎌내야 할 때도 있다. 그 고통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병마와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두 겹의 짓밟힘 속에서도 나는 질경이처럼 무너지지 않고 버텨내야 했다. 건강을 회복해야만 다시 식당 홀에, 주방에 서서 그 쌓인 빚이라는 산을 하나씩 허물고 진정으로 푸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산책로 끝에 다달아 고개를 들었다. 소나무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당당히 서 있었다. 그 푸르름 아래 땅바닥에는 여전히 질경이들이 고개를 들고 줄지여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고맙다! 너희들처럼 나도 인젠 밟혀도 괜찮다. 밟히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법을 배웠으니까...”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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