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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얼룩 씨암탉에게서 받은 계시

안상근      발표시간: 2025-07-31 10:14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안도)박영옥

아침에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니 같은 아빠트에서 사는 할머니가 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느라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책가방은 할머니가 메고 있는 것이였다. 

손녀가 중학교 1학년이여서 혼자 갈수 있는데도 늘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거기에 손녀의 책가방까지 메다보니 할머니는 가방이 내리누르는 무게를 감당하느라고 항상 한쪽 어깨를 잔뜩 치켜세웠다.

그 장면을 바라보노라니 이전에 농촌마을에 사는 엄마집에서 보았던 얼룩 씨암탉이 떠올랐다.

그때 어머니는 병아리들에게 물을 주고 계셨다.

“아이 예뻐라”

너무나 깜찍하고 귀여워 나는 병아리들을 쥐려했다. 새노란 털옷을 입은 병아리를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때다. ‘꾹,꾹’하는 소리와 함께 얼룩 씨암탉이 씽 ㅡ하고 달려오더니 나의 손을 꾹 쪼아놓는 것이였다.

“제 아기를 해치는가 해서 저 모양이구나”

어머니가 웃으시며 한마디 하셨다. 내가 아픈 손을 문지를때 씨암탉은 병아리들을 거느리고 저쪽으로 가는 것이였다. 그리고 벌레를 잡아서는 이 병아리, 저 병아리 입에 넣어주는가 하면 그 누가 병아리들을 해칠가봐 신경을 곤두세운채 여기저기 둘러보는 것이였다. 아직 어린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동물들의 본능인가 싶다.

한달이 지나서 내가 다시 어머니 집에 갔을때 병아리들은 몰라보게 자랐다. 더는 어릴때의 예쁜 모습이 아니였다. 큰 병아리들은 제멋대로 무리를 지어 다녔다. 어미닭은 혼자서 저쪽에서 벌레를 잡아먹고 있었다. 이때 큰 병아리 한마리가 어미닭 근처에 다가가 벌레를 잡아 먹으려하자 어미닭은 마구 쪼아놓는 것이였다. 그 병아리가 아파서 비명을 지르면서 피했다가 다시다가가자 어미닭은 또 사정없이 쪼아놓는 것이였다. 그제야 큰 병아리는 겁을 먹었는지 다시는 어미닭 근처에 다가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벌레잡이를 했다.

(저 닭이 웬 일이야? 제 아기도 몰라보는가부다.)

그때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어미닭을 원망했다. 그러다가 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다. 원래 어미닭은 병아리가 이젠 컸다고 자기절로 자립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였던 것이다. 그것을 보노라니 말 못하는 한갖 미물인 닭들이지만 얼마나 지혜로운지를 느끼게 되였다. 그러면서 친구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친구의 옆집 엄마는 아이가 학교가는 날 아침에는 가장 바삐 도는 시간이라 했다. 아이가 12살인데도 세수를 시켜준다, 옷을 입혀준다, 양말을 신겨주고 거기에다 학교로 데려가고 데려오고…어디 그 뿐이랴! 밥 먹을때면 아이가 손에 저가락 쥐고도 엄마보고 “저 료리를 먹겠어요”하고 말하면 곧 집어주고 물도 떠다주고... 아무튼 온갖 시중을 다 들어준다고 한다. 어느 한번은 친척집에 가서 밥 먹을때 삶은 닭알을 먹지 않고 그냥 앉아있으니 옆에서 먹으라고 채촉하자 이런 말이 튀여 나오더란다.

“엄마가 껍질을 안 발라 주는걸 어떻게 먹습니까?...”

자기절로 할수 있는데도 엄마손을 바라는 그 애를 두고 누굴 탓해야 할가?

나의 한 친구는 딸애가 25살이 되도록 설겆이 한번 안 시켜봤다고 자랑한다. 밥은 더구나 할줄 몰라서 그 친구가 외출할때면 음식을 가득 만들어서 랭장고에 넣어두거나 또는 외식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그 친구와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전화가 울리더니 딸애가 야단쳤다.

“엄마, 아직도 집에 안 오면 난 뭘 먹어요?”

친구가 라면을 끓여 먹으라고 말하자 딸애가 소리쳤다.

“엄마, 한번도 안 끓여봤는데 어떻게 끓여요? 빨리 돌아와요...”

그들 모녀간의 대화에 함께 앉았던 친구들 모두가 머리를 저었다. 이것은 어찌보면 자식문제 같지만 엄연한 부모탓이다. 엄마가 아이를 이렇게 키웠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문득 이전에 작문반 수업을 할때의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어느 주말에 한 아빠가 아홉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왔다. 키도 나이에 비해 작은 편이고 몸도 허약했다. 그날 작문수업이 끝나고 애가 문밖을 나서려고 할때 어디서 사냐고 물었더니 꽤나 먼곳이였다. 그래서 혼자는 못 간다고 말하면서 눌러 앉혔다.

“조금후에 아빠가 데리러 오면 같이 가세요.”

“우리 아빠 나 혼자 돌아오라고 합니다.”

나는 그 애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 빨리 애를 데리러 오라고 했더니 아빠 말이 애가 혼자라도 집에 돌아올수있단다.

“아니, 애가 아직 어린데요.”

“걔는 학교도 그냥 혼자서 다닙니다.”

순간 나는 놀라움과 대견함을 금치 못했다. 그때 작문반 수업이 끝나면 소학교 5,6학년에 다니는 애들도 데리러 오는 학부모들이 많았는데 아직 너무 어려보이는 애가 저절로 그 먼 집까지 척척 오간다는 대견함에 저도 몰래 감탄이 나갔다. 어릴때부터 독립성을 키워주는 애 아빠의 지혜로움에는 더구나 감탄하게 되였다. 

아주 어릴적과 자립할 시기에 보여준 얼룩씨암탉의 제 새끼에 대한 판이한 처사는 계시하는 바가 크다. 동물들도 새끼가 어릴때면 극진한 모성애를 표현하다가도 커서 자립할 시기가 되면 자기절로 자립하도록 곁을 비워주는데 만물의 령장인 인간으로서 왜서 자식의 자강, 자립정신을 키워주지 못한단 말인가?!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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