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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우에서 활짝 피여나는 꽃’ 방려미 무용가의 예술인생

김가혜      발표시간: 2025-07-16 11:51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TV 앞에서 춤 따라 추던 꼬마가 연변가무단의 수석으로

연변가무단 련습실에서 인터뷰를 받고 있는 연변가무단 수석 무용수 방려미.

흔히들‘무용가는 춤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예술가’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연변가무단의 수석 무용수인 방려미(1990년생)는 조선족 전통무용의 아름다움을 전국에 알리는 예술가이다. 자신만의 독창성을 통해 순간을 예술로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세상과 소통하면서 조선족 전통무용의 매력을 팔방에 한껏 발산하고 있다.

◎ 무대 중심에서 빛나는 수석 무용수

“수석 무용수는 독무와 쌍무를 비롯해 작품의 핵심을 이끌어야 합니다. 동작 하나, 표정 하나에 더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수석 무용수로서 방려미는 모든 작품에서 무대의 중심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있다. 무대 우에서의 빛나는 한순간은 무대 아래에서 이어진 피나는 련습의 결과물이다. 그야말로 ‘무대 우 1분이 무대 아래 10년’이다.

기본기 훈련으로 시작되는 하루는 련습에 련습이 거듭되는 일상의 련속이다. “큰 공연이 있으면 몇달, 심지어 몇년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퇴근후에도 혼자 남아 새벽까지 련습할 때가 많아요.”

매일 반복되는 훈련이 지겹지 않을가? “솔직히 지겨울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무용에 대한 사랑이 더 컸죠. 연변을 대표해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 참가하거나 각종 행사에서 조선족의 전통무용을 선보일 때면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 어린 시절부터 피여난 춤에 대한 열정

방려미는 어릴 적부터 춤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엄마 말씀으로는 유치원 때부터 춤추는 걸 좋아했다고 해요. TV에서 춤추는 장면이 나오면 따라 추곤 했대요.”

그러다 훈춘시제일실험소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 때 무용선생님의 눈에 띄여 무용팀에 선발되였다. 훈춘시제일실험소학교는 예술로 유명한 학교였고 무용선생님은 한눈에 이미 방려미의 자질을 알아봤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무용 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무용팀에 뽑힌 후 선생님께서 웃학년 언니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참관시켰는데 그때 웃학년 언니들의 칼춤을 보고 너무 멋있어서 넋을 잃고 말았어요. 더불어 ‘나도 저렇게 춤추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죠.”

그러나 황홀했던 순간도 잠시, 무용을 시작하고는 고통과 도전의 반복이였다. 매일 친구들이 하학하면 집에 돌아갈 때 남아서 무용을 해야 했고 방학도 별로 없었다. 특히 “허리 접기와 다리 찢기 훈련은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웃학년 언니들이 눌러주군 했는데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난 적도 많았어요.” 집에 돌아와 엄마, 아빠에게 이젠 춤을 다시는 안추겠다고 투정부리다가도, 더는 못하겠다고 울다가도 다음 날이면 다시 련습실로 향했다며 웃었다. “결국 춤에 대한 사랑으로 이 모든 걸 이겨냈죠.”

◎ 나의 영원한 ‘1호팬’

눈물의 기초훈련과 기나긴 도전의 시간을 지나오며 종래엔 수석 무용수로 우뚝 설 수 있은 데는 함께 웃고 울며 그 고난의 시간을 같이 버텨주었던 부모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부모님은 제가 큰 공연을 할 때면 훈춘에서 달려와 주세요. 저의 영원한 열혈팬이죠.”

부모님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소학교 때 해외 공연을 갈 때면 집안에서 큰 경비를 부담해야 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항상 제 꿈을 응원해주셨어요.”

어릴적부터 딸의 생각을 백프로 존중해주었다는 부모님은 학습성적이 우수했던 려미가 초중 2학년 무렵 무용전문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도 선뜻 딸의 편에 서주었다.

“소학교 6년 내내 무용을 꾸준히 하다가 초중에 올라가서는 1년 동안 공부만 했었어요. 그러다 훈춘동아무용학교 교장선생님이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학생을 선발했는데 그때 제가 또 한번 뽑혔어요.”

원래 공부를 꽤 잘하던 편이였던지라 초중 1년 동안 열심히 하면서 성적도 많이 올랐다. 반주임선생님은 “공부를 이렇게 잘하는 애인데 진로를 신중하게 선택해달라.”고 부모님을 설득해보기도 했고 방려미를 만류해보기도 했단다.

“공부를 하는 대로 성적이 오르는 성취감도 좋았지만 그래도 저는 무용을 놓을 수 없겠더라구요. 제 생각을 알렸을 때 우리 집에서는 주위의 목소리보다는 저의 선택을 존중해주었어요.”

무용전문학교에서 4년을 무용에만 전념하다가 방려미는 한발 더 내딛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 학교에 남을 수 있을 만큼 성적이 돌출했으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우려는 결심을 내렸던 것이다. 춤을 추면서, 공연을 돌면서 짬짬이 시간을 리용해 시험공부에 매진했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고 2007년에 훌륭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붙었다.

기초가 단단했던 그는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무용 기교를 다지는 데 몰두했고 ‘연습벌레’였던 방미려는 차츰 전국 각종 경연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8년 북경 올림픽 개막식 무대에 올라 민족전통춤을 세계인들에게 선보이는 영예를 안았는가 하면, 전국에서 열리는 무용경연에도 꾸준히 참가하며 빛나는 상도 많이 수상했다. 대학 졸업 즈음에는 CCTV 드라마 <<장백산 아래 우리집>> 감독이 그의 무용표현을 보고 주인공으로 캐스팅 하며 안방극장에 데뷔하는 영광도 누렸다.

◎ 연변가무단, 수석 무용수, 그리고 무용가의 삶

탄탄한 무용 기본기와 활약이 빛을 발했던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연변가무단으로부터 ‘수석 무용수’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입단 제의를 받았다.

외지 진출의 유혹도 많았지만 방려미는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말한다. “우리 민족의 춤을 사랑하고 또 중요한 건 조선족 무용배우로서 저의 뿌리는 연변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고향에 남기로 하고 연변가무단에 입단했어요.”

2012년 제4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서 대형창작가무 <노래 하노라, 장백산>이 금상을, 방미려씨는 신인상을 수상했다.

여태 춤만 추었다고 자부했지만 가무단에 입단하고보니 또 다른 세상이였다. 배움에는 끝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들도 선배님들도 정성과 따뜻한 인내로 방미려의 성장을 지켜봐주었고 가무단에 금방 입단하여 제4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서 독무 <장고춤>을 선보일 기회를 얻게 되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생생하다. “뜻밖의 사정으로 중임을 맡긴 했는데 장고를 잘 치지 못했던지라 팀의 공연에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중압감이 엄청났어요.”

딸의 고민을 듣고 어머니가 훈춘에서 장고를 메고 달려왔고 층간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장고에 방석을 붙여주었다. 퇴근후 집에 오면 엄마를 ‘심사위원’으로 앉혀놓고 장고치는 련습을 하고 또 했단다. 그 노력의 결실로 제4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서 독무 <장고춤> 출연 외에도 무용 <장백선녀>, <샘>, <비약> 등 에서 주인공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방려미는 금상 수상과 함께 신인상까지 휩쓸었다.

2012년 제4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 이어 2016년 제5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서 <아리랑꽃>으로 또 한번 금상을 획득했고 개인 3등공까지 수여받았다.

2016년 제5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서 <아리랑꽃>으로 또 한번 금상을 획득했고 개인 3등공까지 수여받았다.

대형무극 <아리랑꽃>에서 방려미씨는 소녀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한 녀성의 인생을 춤으로 표현해야 했다. 무용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감정의 표현이다. 따라서 무용가는 자신의 감정을 진정으로 리해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많은 무용가들은 감정표현 련습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려 한다.

“거울을 보고 우는 표정을 연구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 어떤 감정선을 연출해야 할지 ‘1인연기’를 시도해보기도 합니다.”<아리랑꽃>이 전달하려는 감정선을 리해하기 위해 장면을 머리속에 재연하며 상황 속으로 몰입하다보면 진짜 눈물이 나더라며 작품에 대한 해석을 곁들이기도 했다.

◎ 무용수로서의 철학- “20%의 천부+80%의 노력”

연변가무단의 수석 무용수이자 무용부 부부장이란 무게는 방려미로 하여금 한시도 게을리해서는 안될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무용은 그래도 천부적인 자질이 뒤받침해 주어야 하지 않냐는 질문에 방려미는 “천부와 노력의 비중을 따진다면 저는 노력이 80%라고 생각해요.” 노력없이 천부만으로는 절대 무용의 길을 걸을 수 없다고 딱잡아 말했다.

구급차에 실려갈 때도 있었고 의사가 무용을 그만두어라 할 정도로 부상을 당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무용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글쎄요... 과연 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가요?” 무용이 아닌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 없을 정도로 지금까지 오로지 춤에 빠져 살았다는 방려미는 지금도 일상이 춤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단다.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커지면 턴을 도는 속도도 빨라진다는 걸 모르시죠?” 무용과 무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방려미는 무대에 올라 있는 것 마냥 행복해보였다.

◎ “조선족 무용의 미래를 위해...”

“제 인생엔 춤 밖에 없었고 무용은 제 인생입니다. 언제까지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나이가 들어도 계속 춤을 추고 싶어요. 조선족 전통무용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길 바랍니다.”

근 15년이 되는 시간을 연변가무단의 수석 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는 방려미는 우리 민족 전통무용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에 조그마한 힘을 바치고 싶다는 포부도 드러냈다. 오로지 무용이라는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는 조선족 전통무용을 전파하고 또 무용을 통해 관객들에게 행복을 전도하고 싶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수많은 상장과 영예가 방려미 무용가가 꿈을 향해 걸어온 길을 짐작게 한다. 무대 우에서 춤으로 문화를 전하는 방려미의 려정은 계속될 것이고 그리하여 “무대 우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가 만들어갈 새로운 장이 무척 기대된다. 

/김가혜 김영화 기자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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