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리영자
해마다 ‘7.1’당창건 기념일이 돌아오면 나는 평생을 당을 위한 사업에 투신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하시면서 당신의 솔선수범으로 자식들을 이끌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눈굽을 적시군 한다.
1922년에 연길시 소영의 광진촌에서 태여난 아버지 리두석은 전주 리씨 가문의 삼대 독자였다. 첫 손군을 손자로 많이 기대하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가 태여난후 조금은 섭섭해 하시다가 “녀자애든 남자애든 건강하게 잘 자라면 되지...”라고 하시면서 ‘귀동녀’라고 불러 주셨다. 덕분에 나는 로인들과 부모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행복한 동년을 보냈다.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께서는 넓은 마당에 그네도 매고 철봉대도 세워주고 자그마한 놀이동산도 만들어놓고 여러가지 꽃도 심어주시면서 어려서부터 건강하게 크라고 심려하셨다. 또한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습관을 키우도록 하려고 마루방 넓은 벽에 그라프를 붙여놓고 바닥을 닦으면 붉은 오각별을, 닦지 않으면 노란 오각별을 붙여주고 일주일동안 붉은 오각별 개수가 많으면 연필이며 필기장, 그림책같은 것을 사주셨다.
광복후 왕청현 배초구제2소학교에서 교장으로 사업하시던 아버지는 194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시고 1951년에 왕청현 당학교 교육장으로 전근하시였으며 그후 왕청현당위 선전부장으로 지내시다가 1959년에 연변주 당학교 교육장으로 사업하시게 되였다. 따라서 왕청현 배초구에서 살던 우리 가정은 왕청으로 이사를 갔다가 연길에 정착하게 되였으며 고중생인 나도 연길시2중에 다니게 되였다.
그때 우리 집에는 남동생 둘과 녀동생 넷에 나까지 자식 7명에 중풍으로 운신을 제대로 하시지 못하는 할머니가 계시였는데 어머니가 할머니 호리와 자식들 뒤시중으로 사업을 접으신 상태라 아버지 혼자로임으로 10명 식구가 24평방메터 남짓한 비좁은 집에서 힘들게 살았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어두운 기색을 보일세라 일곱 자식을 똑같이 사랑해주시고 엄격하게 단속하시였으며 특히 맏이인 나에 대해서는 항상 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시였다.
로동대학을 졸업한 내가 1963년에 왕청현식품공사에 배치를 받게 되자 아버지는 집을 떠나는 나에게 세가지 당부를 하시였다.
첫째로 새로운 일터에 가면 조직의 배치에 복종하고 간부자녀의 티를 내지 말고 겸손하며 맡겨진 사업임무를 잘 완성하거라.
둘째로 적극적으로 당을 따라 학습하며 꼭 입당을 하거라. 조직상의 입당보다 사상상에서 입당을 해야 당과 인민을 위하여 더욱 잘 복무할수 있다.
셋째로 경상적으로 당조직에 사상회보를 하거라. 사상회보가 너의 진보에 많은 도움이 될거다.
아버지의 말씀을 명기한 나는 생소한 일터에서 사업을 열심히 해서 성과도 올리고 크고 작은 영예도 따내면서 입당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 사상회보를 쓰되 꼭 2부를 만들어 한부는 조직에 바치고 한부는 아버지한테 편지로 부쳐 보냈는데 아버지는 바쁘신 와중에도 번마다 회답을 보내와 이미 얻은 영예에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일깨워 주시군 했다.
1966년에 입당지원서까지 쓰고 비준을 받지 못한 나는 연길시사탕술공사에 전근한지 7년이 되는 1983년에야 입당을 쟁취했다. 그때 입당선서를 마치고 아버지 단위에 들려 “아버지, 저 입당선서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축하한다. 그동안 아버지가 너한테 많이 미안했구나. 앞으로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 잘해라...”라고 하시면서 잔등을 다독여 주시였다.
연변라지오방송사업처 부처장, 연변라지오방송국 부총편집, 훈춘현당위 선전부장, 연길시 부시장 등으로 사업하시다가 1978년에 연변출판사로 전근하여 당위서기 겸 사장, 총편집을 맡고 1981년에는 연변주 출판국 국장, 당조 서기 직무까지 겸임하신 아버지는 그즈음 민족출판사업을 춰세우기 위해 밤낮이 따로 없이 사업하시고 계셨다. 특히 중앙과 성, 주 해당부문을 문턱이 다슬도록 찾아다니면서 거액의 자금을 쟁취하여 민족도서 정품생산과 출판사 사업환경 및 임직원들의 거주환경을 개선하는데 큰 공훈을 세우셨다.
아버지는 1985년 리직휴양한 후에도 재직시절보다 더 빠쁘게 보내시였다. 우선은 주덕해동지 기념비 건설 주비소조 성원으로 기념비 정초, 수건 특히 집금 등 중대한 사업에서 한몫을 감당하셨다. 기념비 제막식이 끝나자 아버지는 또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 기금회 상무부회장 직무를 맡고 연변 주내는 물론 북경과 동북3성, 내몽골 등 전국 방방곡곡을 뛰여다니면서 기금을 받아들였다. 그때까지만도 아버지는 건강상태가 좋아서 주내 단거리는 젊은이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러던 1987년 8월 중순의 어느날, 자전거를 타고 기부제보를 받으러 떠난 아버지는 연변병원 앞을 지나다가 교통사고로 륵골 한대가 부러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픔을 참아가며 자전거를 밀고 그 전날에 이미 약속받은 단위에 가서 일을 끝까지 보고서야 귀로에 올랐다.이런 놀라운 의력으로 그는 기금회 동료들과 함께 100만원도 훨씬 넘는 거액의 기금을 모아 총서의 정상적인 출판을 담보하였다.
그리고 또 국가계획위원회로부터 200여만원의 자금을 쟁취하여 연변신화인쇄공장에서 성내에서도 앞장서 수입제 채색인쇄기를 구입하도록 함으로써 조선문도서의 인쇄질을 크게 높이였으며 또 연길시신화서점 청사의 준공을 다그치도록 거액의 자금을 쟁취해 오시기도 하였다.
뇌혈전 후유증으로 지팽이를 짚고 다니시면서도 연변인민출판사를 도와 북경으로 출장을 떠나셨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렬차안에서 재풍이 온데다 대퇴골이 골절되여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여러가지 료법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효험을 보지 못하고 1993년 3월 17일에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다.
퇴직 후에도 초심을 잊지 않고 당을 위한 사업에 여열을 다 바치신 아버지는 나의 계몽스승이자 내 인생의 영원한 롤모델이였다. 그래서 나도 재직시절에는 상업계통에서 몸을 내번지고 사업하여 호평을 받았고 퇴직후에는 연길시 건공가두 장신사회구역에서 당총지 위원, 로인협회 회장, 당지부 서기 등 직무를 맡고 주민들을 위해 봉사를 해오고 있다. 특히 로인협회 회장을 맡은 초기에는 김현자 회원과 둘이서 사비 1000원씩 내여 수입창출활동을 조직했다. 콩을 사다가 된장, 썩장, 오누이장을 만들어 팔고 찰떡, 순대, 고추가루 가공까지 하면서 활동경비를 마련하여 대련관광 등 다채로운 활동도 조직하고 생활이 곤난한 회원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리고 2008년에 남상당지부 서기 직무를 맡은 이래 당원들을 이끌고 뜻깊은 학습활동과 사회공익활동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재해지구 지원, 빈곤대학생,고아 및 빈곤당원, 중환자당원 관심활동 등을 활발하게 조직하였으며 2024년까지 16년 동안에 선후로 23명 로당원의 마지막 길을 바래드렸다. 그런 성과로 남상당지부는 선진당지부로, 나 자신은 건공가두 우수당원, 연길시 모범가정, 연길시 신변감동인물 등으로 여러차나 표창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옳바른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났기에 인생을 후회없이 살아올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32년전에 하늘나라로 떠나가신 아버지가 더욱더 그리워난다.
“아버지,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여나게 해주시여 행복했습니다.남은 인생도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합격된 당원으로 살아가렵니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