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안부길
엄마가 고인이 된지도 어언간 50여년이 된다. 하지만 모성애가 넘쳐흘렀던 엄마에 대한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간다.
1962년9월, 고중3학년이였던 나는 갑자기 발병하여 중퇴하였다.
어둡고 침침한 인생의 터널속에서 갈팡질팡하던 나는 일루의 희망을 갖게 되였다. 그 희망은 바로 작가꿈이였다. 고군분투하는 험로는 가시덩쿨 투성이였다. 연명하기도 어렵고 투병에, 계부의 행패에, 힘든 농사일까지 겹쳐 자학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독서와 창작에 취미가 파랗게 살아나면서 그래도 나만의 락원에서 살았다.
취미가 의지의 원천이고 의지가 견지의 지팽이였다.
나의 독서실은 자그마한 웃방이였다. 장방형 낡은 식탁을 책상으로 삼고 낡은 옷상자 덮개를 책꽂이로 놓았다. 책상은 서쪽켠에 놓았다. 나는 책꽂이 웃벽에 작은 뙤창문을 냈다.
어느 날 엄마가 일밭에서 귀가하면서 개나리 한그루를 떠왔다. 서쪽 뙤창문 앞에 개나리를 심고 물을 주었다. 개나리는 주접이 들지 않고 땅기운을 받아 싱싱하게 자라더니 호함진 꽃을 피웠다.
가끔 독서에 눈이 피로할 때 뙤창문으로 내다보면 개나리가 방긋 웃으며 반겨주어 기분이 상쾌하였다. 개나리도 희망을 갖고 곱게 피여 그윽한 향기를 풍기지 않는가?! 그 유혹에 벌이며, 나비들이 날아와 꽃송이에 앉아 화밀을 채집하며 삶을 즐긴다. 그 와중에 개나리는 타아수분을 한다. 개나리의 희망은 열매가 아닐가?!...
나는 신문이나 방송에 소식보도나 짧막한 통신을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마을 한복판에 락엽송 한대를 세우고 유선 확성기를 안장한 것이 있었다. 후에 발전하여 집집마다 유선방송을 들었다.
어느 날 아침, 왕청현방송국에서 나의 소식보도 한편을 방송하였다.
“여기는 왕청현방송국입니다. 통신원 안부길동무의 통신 한편을 방송하겠습니다…”
내가 쓴 글이 방송된다고 하니 엄마는 일손을 멈추고 도정신해서 경청하셨다. 너무도 즐거워 덩실덩실 춤을 추시며 눈물을 흘리시였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작가꿈을 실현하여 엄마에게 즐거움을 선물하려고 속다짐하였다. 며칠후 신흥우전소에서 마을 대장네 집에 전화가 왔다. 그때는 온 마을에 유선전화 한통밖에 없었다. 전화를 안장하던 날 저녁에 온 마을 사람들이 대장네 집에 모여 시험전화가 오기를 고대하였다. 전화가 오자 기쁨과 신기함은 이루다 형용할 수 없었다. 대장이 우리집에 전화가 왔다고 엄마에게 기별하였다. 내가 외출하였기에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내용은 원고비를 찾아 가라는 통지였다. 엄마는 너무도 즐거워 일손을 제쳐놓고 신흥우전소로 두 주먹을 쥐고 달려갔다. 원고비는 고작 50전이였다. 그 원고비를 찾으려고 왕복 14리길을 한달음에 달려간 엄마였다.
1963년 겨울이였다. 장편소설《붉은바위》(한문)가 출판되였다. 그 책을 사고 싶어 내가 안달아 하자 엄마는 동네에 나가 이집저집 다니며 돈을 꾸었다. 그 돈으로 나는 왕복 30리길인 왕청현서점에 달려가 그 책을 사왔다. 보배를 얻은듯 기쁨이 한량 없었다.
그 책값을 갚기 위해 엄마는 두마리밖에 없는 암탉이 낳은 닭알 20알을 모아 신흥공소합작사에 가져다 팔았다. 닭알 한알에 7전이였고 책값은 1원20전이였다.
겨울은 농한기여서 독서 황금계절이다.
어느 날 내가 집에서 독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집 어머니가 나 보고 손짓하며 우리 집에 불이 났다고 했다. 지붕을 쳐다보니 창고지붕으로 연기가 피여올랐다. 다급히 창고문을 열어보니 벼짚 뒤주에 불이 나 활활 타올랐다. 동네분들의 도움으로 개울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천만다행이였다. 그때는 수도물도, 펌프도 없어 개울에 있는 샘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엄마는 평소에 재물을 받아 빨래하려고 벼짚 뒤주에 재를 모아두군했화재다. 그 재무지에서 불씨가 살아나 화재가 일어 난 것이였다. 3년 묵은 재무지에서 불이 난다더니 그 말이 그른데 없었다. 그때는 빨래 비누를 살 돈도 귀하던 시절이였다.
내 원고가 방송에 발표되면 엄마는 기뻐해 마지 않았다. 번마다 새벽에 일어나 굴뚝 개자리에 돗자리를 펴놓고 랭수 한사발 떠놓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두손을 합장하고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엄마는 념원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엄마의 간절한 념원은 내가 작가꿈을 실현하는 것이였다.
사실 엄마는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였다. 내가 자모 식자관을 넘겨드렸더라면 옛말도 구수하게 잘 하시던 엄마가 더욱 좋은 문화적인 삶을 향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항상 바쁘다는 핑게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후휘막급이였다.
치사랑은 있어도 올리 사랑은 없나 보다.
어언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50여년만에 고향을 찾아갔다. 고향은 옛추억을 돌이켜볼 흔적조차 없이 몰라보게 변해버렸다.
야산에 올라가 개나리를 찾았다. 마침 소담하게 핀 개나리 한그루가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엄마를 그리면서 핸드폰으로 소담하게 피여난 개나리 한송이를 찍어 소중히 간직하였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