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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 로인녀성

[백세인생] 한 도시의 조선족 력사를 기록하는 95세 로인

김명준      발표시간: 2026-04-27 12:04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배재수, 80대에 타자를 배워 매하구 조선족 력사자료 수십만자 정리

 매하구에 살고 있는 95세의 배재수로인

매하구시의 모 복층 아빠트에 살고 있는 95세 고령 배재수로인의 하루 일과는 컴퓨터를 통한 시사뉴스 시청으로부터 시작된다. 컴퓨터는 인터넷 검색기능도 있기에 컴퓨터를 통하면 텔레비죤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실시간 뉴스들을 볼 수 있기에 컴퓨터를 더 선호한다는 그다.

최근, 기자는 매하구시민족문화관 손동수 관장으로부터 “내 생전에 매하구의 조선족 력사를 기록하고야 말겠다.”는 90대 로인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배재수로인의 가정을 방문했다.

배재수로인이 컴퓨터와의 인연을 시작한 지는 1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함께 살고 있던 막내딸이 출국 로무수속 자료를 작성하기 위해 컴퓨터 작업을 하는 모습에서 그는 몹시 부러웠다고 한다.

80대 초반의 배재수로인은 막내딸로부터 타자, 검색 등 컴퓨터 조작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렇게 매일 아침 기상하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뉴스를 시청하고 관심사를 검색하는 것은 10여년째 그의 일상이 되였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일상이 있었으니 바로 인터넷 검색과 현지 조사를 통해 동북항일련군 력사, 중국조선족 력사 특히 매하구시 조선족 력사, 매하구시 조선족 영웅렬사 사적 등 수십만자에 달하는 문자자료를 직접 타자하여 정리하는 것이였다.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그에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서 태여나 1살에 해룡현(현재의 매하구시)에 옮겨와서 일본인 소학교를 다녀야만 했고 재직시절에는 선후로 5개 한족학교의 교장 직을 지낸 적 있는 그는 퇴직후 많은 조선족 젊은이들이 우리 민족의 력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력사 자료를 발굴, 정리해야겠다는 긴박감과 사명감을 느끼게 되였다.

그렇게 한획, 한글자 ‘독수리타자’로 시작한 그의 제2 인생은 95세가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가 지난 10여년간 정리, 타자, 집필한 자료들로는 중국국제출판사에서 정식 출판한 《항일투사 리회영》(한어) 등 공개간행물이 있는가 하면 자비로, 혹은 매하구시민족문화관의 전임관장 추화 등 지성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인쇄한 내부간행물도 수십개나 된다. 그중에는 《동북항일련군》(한어, 1-2권), 《해룡현(현 매하구시)인민의 항일투쟁사》(한어), 《간고한 생활, 간고한 항전》(조선어), 《매하구시(원 해룡현) 조선족 명인록》(한어), 《료녕성 본계시 산성자향 박가촌과 길림성 서란현 박가촌 박씨의 래력》(한어), 《조선인, 조선족, 한국인 칭호의 래력에 대한 설명》(한어) 등 한어, 조선어로 된 수십만자에 달하는 자료를 포괄한다.

그중에서 2017년, 당시 매하구민족문화관 관장인 추화가 해당부문을 찾아 자금을 해결하여 내부간행물 《간고한 생활, 간고한 항전》을 500부 인쇄하여  매하구시의 조선족 중소학교 학생과 조선족 가정들에 전달하여 매하구 땅에서의 120여년 조선족 력사와 그 과정에서 용솟음쳐나온, 나라와 인민을 위해 훌륭한 업적을 쌓은 여러 분야의 조선족들을 널리 알렸다. 그외에도 자비로 인쇄발행한 《동북항일련군》(한어, 1-2권), 《해룡현(현 매하구시)인민의 항일투쟁사》(한어)는 매하구시의 한족 중소학교와 여러 사회구역에 기증했으며 지난해에는 《매하구시 영웅렬사명단(항일, 해방, 항미원조 시기)》을 정리하여 매하구시력사박물관에 기증하여 해당부문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31년에 ‘남조선’에서 태여났다.”는 배재수로인은 한살에 어머니 등에 업혀 해룡현 쌍봉촌 마가거리에 이주해왔다. 당시 일제의 압박에 의해 소학교 3학년 2번째 학기부터 일본어를 배우면서 1944년에 사평성 해룡현 해룡거리국민우급학교를 졸업한 그는 현재 조선어와 한어, 일본어까지 류창하게 구사한다.

1951년 료녕성 청원현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갔다가 만난 청원현정부 교육과에 근무하는 소학교 동창 최의철이 청원현에 교원이 부족하다며 만류하는 바람에 배재수는 20살에 청원현 4가 토구자에서 교육사업에 뛰여들게 된다. 2년후인 1953년에 청원현 인대대표로, 1954년에는 성모범교사와 성소수민족 우수대표로 선거되였고 1957년 입당한 그는 30살에 성행정간부학교에서 1년간 연수를 마치고 청원현 북삼가공사중심학교 교장으로 되였다. 이듬해에 해룡현에 계시는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조직에 신청하여 해룡현에 돌아온 배재수는 선후하여 해룡진학교, 성남향학교, 서광중학교(길림성 농촌 중점학교), 해룡현교사진수학교 교장을 력임했다. 현교육국 인사과 과장, 현 학교 운영기업 경리 등 직을 맡다가 1990년에 퇴직한 후에도 정직한 인성과 뛰여난 활동능력이 사회의 인정을 받아 선후하여 매하구시의 모 한국 독자기업의 관리부장, 쌀가공회사의 부총경리 등 직에 위촉되였다. 그동안 그는 한국에 있는 리회영선생 후손들의 초청을 받고 수교 초기에 한국에 가서 동북항일련군 력사, 한국인 독립투사 력사, 매하구 조선족 력사에 관한 강좌를 2차례 하며 한국인 청중들의 찬사를 받았다. 최근 몇년간, 배재수로인은 매하구시 신화가두의 건국 등 여러 사회구역에서 동북항일련군 정신 계승 등 홍색강좌를  수십차례나 진행해 사회구역 간부와 주민들의 일치한 호평을 받고 있다.

1남2녀, 세 자식중 최고인민법원에서 퇴직한 아들이 외지에 거주중이고 두 딸이 외국에 나가있다보니 몇년전 조강지처와 사별한 로인은 한족 녀성과 재혼하여 원래 거주하던 매하구시의 모 복식아빠트에 거주하고 있다.

기자들을 마중하여 실내 2층 층계를 씨엉씨엉 오르는 로인의 모습에서 90세 중반의 초고령 로인의 모습을 찾아볼수 없었다.

95세에도 60대 못지 않게 건강하고 동안인 건강비결을 물었더니 락천적인 마음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분 안좋은 일이 있더라도 오늘을 넘기지 않고 잊는다고 말했다. 부인에 따르면 배로인은 성격이 아주 유머러스한바 매일 인터넷에서 우스운 얘기를 몇마디씩 검색하여 부인에게 해주어 그를 웃겨준다고 말했다. 매일 붓에 물을 묻혀 쾌속건조 종이에 붓글씨를 쓰는데 그 흔적이 말라서 없어지면 하루 최소 15번을 쓰고 있다. 그 외에도 매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짐없이 부인의 손을 잡고 동네에서 최소 7,000보를 산책하는 것이 일과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한다.

“내 생전에 매하구의 조선족 력사를 기록하고야 말겠다.”던 배재수로인, 그 과업을 원만히 완수한 그는 95세의 고령에도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기 위해 매일 컴퓨터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며 인터넷 세계에 빠진다.

/유경봉, 김명준 기자 


编辑:유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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