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옥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화룡현 용화공사 상화촌(지금의 화룡시 남평진 흥화촌)의 학교 새 건물을 짓고 가꾸는 데 우리 힘을 보탰던 뿌듯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입학했을 때, 우리 소학생들이 공부하던 교실은 흙벽에 벼짚 이영을 얹은 낮고 작은 건물이였다. 운동장 서쪽에는 양철지붕을 얹은 큰 교실이 있었는데 주로 중학생들이 사용했고 영웅 사적을 전시하거나 대규모 집회가 있을 때면 온 학교 학생들이 그곳에 모였다. 우리는 언제나 넓은 교실에서 공부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1974년 초봄, 소학교 5학년이였던 어느 날, 반주임 선생님께서 싱글벙글 웃으시며 교실로 들어오셨다.
"동무들! 좋은 소식이예요. 학교에서 새 학교를 짓는답니다."
"와!"
"그런데 벽돌을 우리 손으로 운반해야 합니다."
"그래도 좋아요!"
교실은 순식간에 들끓었다. 우리는 새 교실에 입주한 것처럼 서로 끌어안고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새학교 짓기에 첫 삽이 들어갔다. 생산대대에서는 경비를 절약하고자 직접 벽돌을 구워 내기로 하고 운동장 동쪽에 커다란 벽돌가마를 지었다. 대대 사원들이 삽과 곡괭이로 기초를 파기 시작했고, 우리 아이들은 구워낸 토벽돌을 가마에 날라들이고 다시 밖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온몸이 벽돌먼지로 뒤덮이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으며 팔과 허리가 시큰거렸지만 누구 하나 힘들다고 짜증내는 아이가 없었다. 모두 새 교실에서 공부할 날을 꿈꾸며 즐거워했다.
화룡으로부터 벽돌을 실은 운반차도 이따금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공사 기일을 단축하고 질좋은 벽돌을 쓰기 위해서였다. 차가 들어서면 수업 시간이라도 학급 순서대로 벽돌을 부리워야 했다. 당시만 해도 물자가 귀해 벽돌공장에서 줄을 서 기다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우리는 그 시간이 바로 새 교실을 향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하며 팔을 걷어붙였다.
토벽돌을 벽돌가마에 날라들이고 다 구워진 벽돌을 벽돌가마에서 꺼내고 벽돌운반차가 오면 수업을 정지하면서라도 벽돌을 부리워야하는 고된 로동때문에 아이들마다 입술이 부르트고 코안이 헐고 얼굴에 피곤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새 교실에서 공부하면 저절로 공부가 될 것같은 환상에 깊숙하게 빠져 있었다.
대대의 지원과 사원들의 노력, 우리 아이들의 정성 덕분에 새 학교 건물은 몇 달 만에 우뚝 솟아올랐다.
그해 가을, 드디여 새 교실에 입주했다. 낮고 어두컴컴하던 예전과 달리, 창문이 환하고 널직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시간은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다. 당시로서는 우리 학교 벽돌 건물이 전 대대에서 유일하기도 했다.
건물이 서자 이번에는 주변 환경을 가꿀 차례였다. 학교 앞마당을 고르고 제단식 층계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업간체조 시간을 리용해 학교에서 3리 떨어진 채석장으로 돌을 가지러 다녔다. 안고, 메고, 업고, 끼고 –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하루에 한 번씩 돌을 날랐다. 며칠간 쌓인 돌로 일군들이 넓은 화단을 만들었고 이듬해 봄 우리는 학교 뒤산에서 소나무를 파다가 그 화단에 옮겨 심었다. 봉선화, 접시꽃, 나팔꽃, 코스모스도 함께 심었다.
학교 뒤마당에는 깊이 7~8메터 되는 우물을 팠다. 솜씨 좋은 선생님께서 드레박을 만들어 주셨고, 우리는 그 물로 소나무와 화단에 정성껏 물을 주었다.
다음은 운동장 정리였다. 울퉁불퉁한 운동장을 평평하게 고르고, 운동장 세 면에 백양나무를 두 줄로 옮겨 심었다. 백양나무는 두만강변 숲에서 어른 팔뚝만 한 굵기로 잘라 왔으며, 두 메터 간격으로 똑같은 높이에 심었다. 늦봄이 되자 잘린 웃부분에서 파란 싹이 돋아나더니, 무더운 여름이 되자 어느새 가지를 쑥쑥 뻗으며 울창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의 손으로 일떠서고 가꾸어진 새 학교에서 나는 3년간 공부했다. 시험을 거쳐 공사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를 떠나게 되였고 이듬해 여름 다시 학교를 찾았을 때 백양나무는 운동장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소나무는 푸르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4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어느 가을, 고향에 내려갔다가 학교를 찾아보니 그 모습은 너무나도 변해 있었다.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농촌인구가 줄어들고 학생 수도 줄어, 랑랑한 글 읽는 소리는 사라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운동장에서 뛰노는 모습도 자취를 감췄다. 학교 건물은 텅 비였고, 가장 큰 교실 한 칸만 촌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기와는 곳곳이 파손되어 비가 새고 운동장 둘레의 백양나무도 베여지고 그루터기만 남아있었다. 우물도 흔적만 남았고, 소나무도 사라졌다. 2년 뒤 여름 다시 찾았을 때는 넓은 운동장마저 옥수수밭으로 변해 있었다.
새 학교 새 교실, 工자모양으로 지어져서 교무실과 일곱개 교실이 나란히 잇대여 있던 학교, 그 학교에서 우리는 앞날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문을 열고 학교를 꾸린다는 년대에 비록 문자지식은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사회실천경험은 어느때보다도 많이 쌓았다. 사람이 되는 도리도 그 학교에서 깨우쳤다. 우리의 힘을 보태고 우리의 두손으로 정성담아 가꾸었던 벽돌학교, 우리 산골아이들에게도 벽돌로 지은 학교건물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긍지감을 느끼게 했던 학교였다.
개혁개방의 물결속에서 어쩔수없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 학교이지만 산골아이들에게 앞날에 대한 꿈을 키워주었고 멀리 날 수 있는 날개를 굳혀주었던 학교는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우뚝 솟아있을 것이다.

최진옥 프로필
1985년 동북수리수전전문학교 졸업
1985년부터 2022년까지 화룡시수리국에서 근무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