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의 화려함에서 인민의 품으로, 변화하는 극장의 발자취
장춘의 중경로(重庆路)와 문화가(文化街)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독특한 스타일의 건물 하나가 고층 빌딩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다. 갈색 줄무늬 패턴의 면벽돌(条纹面砖)로 꾸민 외벽과 생동감 있는 곡선을 가진 이 건물은 거의 백 년 동안 도시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아 왔다. 이 건물은 장춘 사람들의 기억속에 ‘과거 가장 호화로운 영화관’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건설중인 원위만주국시기 풍락극장 (자료사진)
1933년 11월 25일, 풍락극장은 위만주국시기 장춘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중 하나였던 풍락로(현 중경로)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풍락로는 당시에 상점과 차량, 행인으로 북적거렸으며 장춘의 고급 식당과 백화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였다. 극장의 부지 면적은 3,800평방메터로 지상 3층 규모의 건물에는 다양한 곡선 요소가 도입되였다. 1935년 12월, 극장이 정식으로 개관하였으며 1,124개의 고정 좌석과 장식이 호화로운 특별석이 포함되여 있었으며 당시 최신형 독일제 ‘심플렉스’ 영사기도 도입하여 당시 일본 고위 관료들이 방문하는 ‘극동 일류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일제 강점기기간에 탄생한 풍락극장은 건립 초기부터 뚜렷한 차별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인만 출입이 허용되였고 중국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였으며 이 공간은 침략자들이 장춘에서 특권을 과시하고 사치스러운 오락을 즐기는 장소로 활용되였다. 따라서 이 건물의 초기 력사에는 식민 지배의 억압적 그림자가 깊이 새겨져 있다.

원위만주국시기 풍락극장의 관중청 (자료사진)
력사의 흐름은 극장의 변화를 가져왔다. 1946년, 풍락로는 중경로로 개명하였고 극장은 ‘중경대희극원’으로 재편명되여 국민혁명군 신일군 응양평극사(鹰扬评剧社)의 본거지로 되였다. 이곳에서는 경극 작품과 상해 또는 미국 영화회사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번갈아 상영되였다. 그러나 1947년 장춘의 대규모 정전 이후 이 번화한 극장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 장춘이 해방되면서 극장은 새로운 활력을 얻어 ‘승리영화관’(胜利电影院)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고 당시 장춘에서 시설이 가장 좋은 극장이 되였으며 도시의 주요 행사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되였다. 해방전쟁 시기에는 여기서 여러 차례 자선 공연이 열려 빈민 구제와 전쟁 지원 자금을 모았으며 항미원조전쟁 기간 900여명의 각계 대표들이 이곳에서 ‘장춘시 항미원조분회’ 설립을 선포했다. 장춘시문공단은 오페라 〈동존서〉(董存瑞)를 10회 련속 공연하여 3,000만원(동북페)을 모금하여 전선에 지원했다.

20세기 50년대 승리영화관 (자료사진)
1952년, 매란방(梅兰芳) 극단의 공연은 승리영화관에 화려한 기록을 남겼다. 극단은 떠나는 날 매란방과 매보구 부자가 무대에서 함께 〈금산사〉(金山寺)와 〈단교〉(断桥)를 연기했는데 이는 장춘 문화사에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있다. 1954년, 길림성문화국은 전 성의 영화관 등급을 평가했고 그중 승리영화관은 일등급 영화관의 자리를 차지했다. 식민통치하에 일본인이 전문 사용하던 풍락극장부터 식민지 색채를 벗고 중경대희극원, 홍색 기억을 담아 전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승리영화관까지 이 건축물은 20여년 동안 일본 침략자들을 위했던 공간에서부터 중국 일반 대중이 혜택을 받는 공간으로 깊은 변화를 겪었다. 이름이 바뀔 때마다 시대의 흔적이 새겨졌으며 장춘이 식민지배에서 민족해방을 거쳐 번영으로 나아가는 력사적 과정도 목격하고 있다.
/길림일보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