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책 한권을 통독한 기억이 언제였던지 떠올려본 적이 있는가? 짧은 영상과 미니 드라마에 빠져있지는 않은가? 조사에 따르면 2024년 우리 나라 성인 인당 독서량은 4.79권인 반면 인당 매일 디지털 미디어 접촉 시간은 3시간을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독서 방식은 크게 변화했다. 예전에는 책을 손에 들고 인쇄 된 글자를 한줄씩 읽었다면 지금은 손가락만 움직이면 정보의 바다를 자유롭게 누빌 수 있다. 15분이면 진행자가 한권의 책을 ‘요약 설명’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3분이면 짧은 영상으로 한편의 영화를 ‘완전 감상’할 수 있으며 AI 도구를 활용하면 몇십초 만에 한권 책의 주요내용을 추출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정보 폭발’의 디지털 시대에 몇시간, 며칠, 심지어 몇달에 걸쳐 고전작품 한편을 완독하는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을가?
독서의 방식은 더 풍부해졌지만 독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한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어쩌면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겠으나 독서를 통해서만 길러지는 사고 능력, 도달하는 사상의 경지, 창조하는 정신세계는 책을 읽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책을 읽지 않는다면 짧은 영상이나 공식 계정의 ‘언어유희’(梗)도 받아치지 못할 수 있다. 례를 들어 영화 《장안 삼만리》(长安三万里)가 크게 인기를 얻으며 '가벼운 배는 이미 만겹 산을 지났다'(轻舟已过万重山)는 구절이 짧은 영상의 인기 문구가 되였다. '량쪽 강변의 원숭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배를 타고 만겹 산을 이미 지났다.' 이 두 구절은 경치를 묘사함과 동시에 비유와 상징도 담고 있으며 리백이 온갖 어려움을 겪고 다시 평탄한 길을 밟은 상쾌함을 표현한 것이다. 이 함의를 리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교통수단의 속도가 빠름을 형용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의미 측면에서 한 수 접는 셈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편의 SNS 게시글을 올리든 짧은 영상을 제작하든 가장 적절한 문자와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마음속 생각을 표현한다. 그러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언어가 빈곤하고 말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며 때로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보다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추가적으로 더 지닌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끼리는 단지 사소한 일상생활만 론의할 뿐 아니라 우아한 취미생활에 관한 주제로도 인츰 전환이 가능하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새가 강물을 스치며 날아가는 것을 보면 '떨어지는 노을 속에 외기러기 홀로 날고 가을 물빛은 푸른 하늘 한색으로 물들였네.' 를 떠올릴 수 있지 단순히 '새가 정말 많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꼭대기에 올라 '반드시 정상에 올라 더 낮은 산들을 굽어보리라' 라며 감탄을 하지 단순히 '산이 정말 높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책을 읽지 않으면 눈앞이 바로 전부의 세계이다. 독서습관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은 항상 시간과 공간에 갇혀 눈앞의 하찮은 일들만 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인식의 한계’에 빠지기 쉬워 셈법과 빅데이터가 전송하는 편면적인 정보에 갇히기 쉽다. 그러나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초능력’을 지니고 있어 무수히 많은 다른 세계로 진입하여 천백년전의 선현 철학자들과 대담할 수 있다. 따라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침착하고 통달하며, 편협하거나 고집스럽지 않다.
작가 왕몽은 일찍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독서에는 훑어보기가 포함되지만 훑어보기는 독서와 같지 않으며 더우기 고학, 열독, 정독과는 더 같지 않다. 정보는 학문과 같지 않고 더우기 견식, 지혜와 품질과는 더 같지 않다. 전파되는 것은 진정한 접수와 수확과는 같지 않다.” 모바일 인터넷 시대, 우리는 여전히 독서가 필요하며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읽고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
신기술은 우리의 생활을 빠르게 변화시킨다. 그러나 고전작품에 함유된 정감과 철리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새롭다. 기술이 우리의 생활을 더 편리하게 만들어준다면 독서는 우리의 생명을 더 광활하게 넓혀준다.
/인민일보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