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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어머니의 코고무신

안상근      발표시간: 2025-10-28 11:16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김삼철

내가 철부지였던 시절, 어머니가 신고 다니던 하얀 코고무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코마루가 찡해나면서 고생속에서 살아오신 어머니가 한없이 그리워난다.

어머니의 새하얀 코고무신은 1947년도쯤 페결핵병에 걸려 룡정의과대학병원에서 치료하던 아버지가 큰 맘먹고 어머니에게 사준 ‘사랑의 선물’이였다.

그때 우리 집은 연길현14구(태양구) 중흥촌에서 수전농사를 하며 살았는데 아버지의 페결핵병이 위중하여  어머니가 룡정의과대학병원 부근의 판자집 한칸을 세내여 아버지가 거기서 주숙하며 병을 치료하였다. 그때 룡정의과대학병원은 입원병동이 없어 환자들은 거개가 병원주위의 개인집을 세맡아 거처하면서 병치료를 하였다. 

그때 서른다섯 한창나이로 젊은 어머니가 치마저고리에 벼짚신을 신은 것이 몹시 안스러웠는지 아버지가 어머니와 상의도 없이 부근상점에 가서 큰맘 먹고 새하얀 코고무신을 사왔다. 그때 새하얀 코고무신은 신코가 당실하여 보기가 좋았는데 젊은 녀성들이 즐겨 신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정살림이 궁색하여 그때껏 그 신을 사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새 신을 보고 대노하여 아버지를 질책하였다. “병원비도 부족하여 걱정되는데 어찌 아이처럼 이렇게 경솔하게 처사하는가요?”

어머니는 오직 남편의 병치료만 생각하다나니 자기의 처지같은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서른다섯 젊은 각시가 격에 맞지 않게 한복에 벼짚신을 신으면 남이 웃을수도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벼짚신은 70세가 넘는 할아버지가 밤도와 만든 것이여서 매끈하지 못했고 모양도 부시시하여 꼴불견이였다. 그러니 아버지가 신경 쓰지이 않을리 만무했다. 당시 어린 내가 보기에도 옷과 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감이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성난 음성에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말싸움도 맞장구를 쳐야 격렬해지겠는데 아버지가 “나 죽었소”하고 대꾸조차 없으니 어머니는 혼자서 치미는 화를 참느라 애썼다.

치료비가 부족하면 바쁜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버지 병치료비를 마련하느라 어머니는 입쌀을 50-60근씩 이고지고 30리 떨어진 연길장에 가서 여러번 팔군했다. 그러니 어머니가 화를 내지 않을수 없었다.

한참후 어머니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어버지가“여하튼 사온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신어나 보오. 맞는지?” 하고 권했다.  어머니가 신을 신어보니 과연 맵시가 났다. 벼짚신을 신었을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새하얀 저고리에 검정치마, 당실 코가 들린 새하얀 코고무신은 당시 조선족 젊은 녀성들의 시체멋처럼 썩 잘 조화되였다. 어머니는 보통키에 얼굴이 동글납작하여 보기가 고왔다. 거기에 피부색까지 하얗고 이뻐서 매력적이였다. 아버지는 중매로 어머니와 첫 선을 보았는데 어머니 피부가 너무 고와 첫눈에 정이 들어 인차 결혼식을 올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코고무신을 어머니에게 사주고 채 1년도 못가 세상을 뜨시였다. 그러니 아버지의 그 코고무신은 어머니에게 사준 마지막 선물인셈이다. 그후 어머니는 코고무신을 나들이 할때만 신고 다니면서 10여년을 아껴 신었다. 일하려 갈때거나 동네돌이를 할 때는  코고무신을 신지 않고 벼짚신을 신고 다녔다. 그래서 할아버지도 핀잔을 주었지만 어머니는 누가 뭐라 해도 새하얀 코고무신을 소중히 여기며 아끼였다. 

집안일에다 밭일까지... 어머니에게는 일도 많았다. 일흔이 넘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셨으니 어머니의  시집살이 고생을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었다. 낮에는 온 하루 밭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일밭으로 다닐때 걸어서 다닌 것이 아니라 반달음으로 다녔다. 그래서 마을분들은 어머니가 일밭으로 다닐때는 날아서 다닌다고까지 말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뒤에는 항상 먼지가 일었다. 

세월이 흘러 5-6년이 지나니 새하얀 코고무신도 때가 오르고 해빛과 바람에 색갈이 검어지고 고무가 트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바느질로 꿰매여 신고 다니다보니 신에는 실밥이 다닥다닥하여 보기가 흉하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 신을 새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였다. 아마도 그 신에 아버지 사랑이 깃들어 있었기때문일 것이다. 

어느 한번은 모내기를 끝낸 어머니가 50근 잘되는 입쌀을 이고지고 연길시장에 팔러갔다. 소금, 콩기름, 석유를 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옷감도 장만해야 했으니 쌀을 팔아야 했다. 

그날 아침, 나도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일손을 거들었다. 30리가 넘는 연길시장으로 가자면 일찍 서둘러야 했다. 그때 길은 모두 모래가 섞인 흙길이였다.  그날 오후 나는 명심하여 어머니 마중을 떠났다. 아래집 벽시계가 오후 두시를 가르키자 나는 연길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우쳤다. 약3리 가량 걸으니 고향의 신단수 ‘7자나무’가 신작로 곁에서 반겨주었다. 비술나무인데 수백년 자랐는데도 영양이 충족하여서인지 름름하게 자라면서 ‘7자’모양을 뽐내고 있었다. 날씨가 무더워 ‘7자나무’우에 올라가 가로 타고 앉았다. 마치 아버지 목마를 탄 것처럼 아주 따스하고 편안하였다. 가끔씩 불어대는 바람에 나무그늘속은 매우 시원하였다. 한참 연길쪽을 살피는데 저 멀리에서 잔잔한 흙먼지를 일구며 오는 이가 있었다. 찬찬히 여겨보니 어머니가 분명했다. 

나는 인차 나무에서 뛰여내려 어머니를 향해 100메터 경주라도 하듯 뛰여갔다. 어머니는 쌀을 담아갔던 주머니들을 보에 싸서 등허리에 매고 량손에는 코고무신을 한짝씩 쥐고 반달음에 오고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엄마!”하고 부르며 달려가 어머니품에 안기였다. 어머니는 마중나온 나를 더없이 반기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였다. 그리고는 개눈알사탕 두알을 꺼내 한알은 내입에 넣어주고 한알은 내손에 쥐여 주었다. 어머니 얼굴을 보니 입술은 말라 터져 피빛이 력력하였다. 보아히니 어머니는 오늘도 돈이 아까워 몇십전 안되는 국밥도 드시지 않고 점심을 굶고 오는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더없이 불쌍히 여겨져 손에 쥔 개눈알사탕 한알을 제꺽 어머니입에 넣고 손으로 어머니 입을 막았다. 순간 어머니는 “너도 인제는 헴이 다 들었구나.”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이였다.

‘7자나무’ 그늘밑에서 나와 어머니는 개눈알사탕을 한알씩 녹이며 달디단 모자의 정을 나누었다. 그때 녹이던 개눈알사탕 맛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사탕맛보다 달콤하다. 지금 내 나이 86세 고령이 되였어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에서 어머니의 참사랑이 물결치고 있는 듯 싶다.

이날 어머니는 연길시장에서 쌀을 팔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옷감을 샀다. 모두 옥광목을 사서 그 옷감을 새하얀 옷감으로 만들자면 또 어머니의 손길이 여러번 가야 하였다. 나는 어머니더러 빨리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점심을 잡숫지 않아 배에서 꼬르락 소리가 들렸기때문이다. 나는 어머니더러 신을 신고 가자고 권했다. 맨발바람으로 걸어다닌 어머니의 발은 30대 녀자의 발이라고 볼수 없었다. 새까맣게 타고 터진 어머니의 발은 말그대로 만신창이였다. 발뒤축은  터 갈라져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파 어머니더러 코고무신을 신고 천천히 가자고 하였다. 당시 어머니의 인생은 ‘꼬리없는 소’와 같았다. 끝없는 가정일들이 어머니를 쉴새없이 괴롭혔다.

하루세끼 음식에 돼지기르기, 닭기르기, 토끼기르기, 거기에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색다른 음식 만들어 올리기... 반반한 음식은 시부모님 음식상에 항상 먼저 올리였다. 일흔이 넘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여 가정일과 밭일을 도와 줄 처지가 못되다나니 어머니는 일밭으로 다니면서도 길바닥과 하늘이 어떻게 생긴지도 여겨볼 여유가 없었다. 

30대 중반으로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는 남의 소를 빌어 논밭을 갈고 씨를 뿌려 피눈물 흘리며 농사를 지어 우리 세 아들을 훌륭히 키워 출세시켰다. 큰형님은 교원사업을 하고 둘째형님은 중점대학으로 가고 나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군이 되였다. 나는 더는 눈물겨운 어머니의 인생을 보고만 있을수 없어 초중을 졸업한후 단호히 귀향길을 선택하여 농민이 되였다. 내가 농사일을 시작한후 어머니 어깨가 가벼워 졌고 50대에 이르서는 그 다닥다닥 기운 코고무신을 버리고 코가 넙죽한 코고무신을 사드려 편히 신게 하였다.

50대에 하얀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으시고 머리에 하얀 전수건을 치고 하얀 고무신을 신으니 어머니는 진짜 할머니가 다 되였다. 세월의 세파속에서 어머니는 너무도 일찍 할머니가 되였다. 어머니는 회갑나이가 지났지만 회갑상을 받지 않겠다고 우겨서 결국 우리집은 3대가 회갑상을 받지 않았다.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마지막 가는 길도 남의 집 메주콩을 이개주다가 뇌출혈로 불시에 사망하시였다.

일생에 새하얀 코고무신 한쌍만 신은 불쌍한 어머니는 한생을 고생속에서 살면서도 한번 성을 낸 일이 없었다. 마음이 선량해서였을가? 어머니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를 고스란히 희생하였다. 그리 비싸지도 않은 코고무신도 마음대로 신지 못한 어머니의 인생, 그런 어머니를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된다.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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