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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도시]길림지역에 흩어져 있는 료·금 시대 고성들

차영국      발표시간: 2025-12-09 09:54       출처: 길림시박물관 选择字号【

-격동의 시대를 침묵으로 기록한 소중한 유산  

현재의 길림시는 력사상 료나라 동경도(东京道)의 관할지역이였는데 녀진족의 수령 완안아구다(完顔阿骨打)가 금 정권을 세워 료나라를 멸망시키며 북방지역을 지배했는데 이때 길림시는 금나라 상경로(上京路)의 관할지역이 되였다.

길림지역에는 수많은 료와 금의 300여년 지배기간 동안의 성곽 유적이 남아있으며 다양한 민족들이 이곳에 군사적 흔적을 남겼다.

길림지역에서 발견된 료나라 시대에 건설하고 금나라 시대 사용된 성(城堡)이 총 28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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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송강만고류》의 부분

부르하고성(富尔哈古城)

부르하고성은 료·금 시대 고성으로 명나라때는 후룬사부(扈倫四部) 중 하나인 우라부(乌拉部)가 사용하며 우라부 도성의 군사요새로 되였다. 청 건륭년간에는 불소노베러(佛索诺贝勒)가 거주했다.

이 성은 전부르통하, 후부르통하와 송화강의 사이에 위치하며 주변은 평탄한 충적 평야이다. 고성 서쪽 1.2키로메터에 송화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북쪽 2키로메터에 송화강의 지류인 전부르통하, 남쪽 0.5키로메터에 동서로 흐르는 후부르통하가 있다.

부르하고성은 력사적으로 '부르하(伏尔哈)성'으로 불렸다. 평면도를 보면 네모형이며 남문만 있고 방향은 160도이다. 성벽은 황토를 층층이 쌓아올렸으며 마면, 옹성, 해자 유적이 남아 있다. 동벽 북단이 부분적으로 파괴되고 서벽과 북벽에 수로로 인해 두개의 틈이 생겼지만 나머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여 있다. 성 내 서남쪽 모서리에는 우물이 있었으나 최근 메워졌다. 성 내에서는 기와 조각, 도자기 파편 등이 발견되였다.

대상고성(大常古城)

우라가 만족진 동북쪽 대상촌에 위치해 있다. 평면도를 보면 네모형에 가깝고 동벽 중간이 서남쪽으로 14도 기울어져 있다. 둘레가 1061.5메터이며 서벽은 홍수로 류실되였고 나머지 3개 면은 비교적 잘 보존되여 있다. 동·남·북 세개의 성문이 있다.

동문은 동벽 북단에서 남쪽으로 150메터 지점에 있으며 옹성(반원형, 변 길이 21메터)이 남쪽으로 열려 있다. 남문은 남벽 동단에서 서쪽으로 66.5메터 지점(너비 6메터), 북문은 북벽 서단에서 동쪽으로 146메터 지점(잔존 너비 6메터)이다.

동·서·남벽 외측에는 인공 해자 유적이 있다.

성 내에서는 기와 조각, 도자기 파편 외에도 석추(石臼), 옥인(玉人), 옥구슬, 철검, 자물쇠, 당·송 시대 동전 등이 출토되였다. 성 동쪽 1.5리 되는 지점에서는 철제 쟁기, 석함 등이 출토되였다.

삼가자고성(三家子古城)

현지인들은 '옛성' 또는 '성자(小城子)'라 부른다. 우라가 만족진 삼가자촌 서남쪽에 위치해있으며 동남쪽으로 대구전진 양목과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서북쪽으로 송화강과 약 100메터 거리이며 남쪽으로 전삼가자툰(前三家子屯)과 1.5키로메터 떨어져 있다. 평면도를 보면 네모형에 가깝고 성벽 기단은 돌로 쌓여있다. 성벽은 내·중·외벽 3중 구조이나 외벽은 대부분 류실되였고 중벽은 동북부와 서북쪽 모서리만 남아 있다. 내성도 부분적으로 훼손되였다.

이 성은 료·금 시대 녀진족이 건설한 강가의 군사 성채로 봉화 신호를 보내는 망루 역할을 했다. 특이한 점은 첫째, 내성 북벽 중앙에 내·중·외벽을 련결하는 흙단이 있어(상부 너비 10메터) 병사들이 세 성벽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둘째, 전체 성벽 기단이 돌로 쌓여 매우 견고했다. 성 전체 면적은 약 10,000평방메터이다. 현재는 내성 서벽과 북벽 일부만 흔적이 남아있고 나머지는 농경지로 변했다.

부르하고성, 대상고성, 삼가자고성으로 이루어진 우라 연안 고성군은 금나라 성곽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2013년 5월, 국무원에 의해 제7진 전국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였다.

전진고성(前进古城)

교하시에 위치한 금 유적으로 료 성종시기(982~1031년)에 건설된 군사 성이다. 거란족 통치자가 녀진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방어벽과 수비성으로 구성되였는바 모두 흙으로 쌓았다.

성 내부에는 주거지가 있고 군용 철갑 조각, 화살촉 등이 출토되였다. 내성 외곽 100메터 범위에는 저수지와 우물이 많으며 남쪽 우물 하나는 지금도 물이 솟는다. 방어벽 서쪽 3,000메터 산중턱에는 기대 받침돌이 하나 있다. 이곳 북쪽 2메터 지점에는 석재 계단과 돌담이 있으며 그 우에 약 1,000평방메터 평지가 있어 성문 또는 역참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해발 657메터로 돈화시 퇀산자(团山子)에서 동북쪽으로 4.5키로메터, 서북쪽으로 퇀산자 주봉에서 4키로메터, 서쪽으로 교하시 전진향 삼하툰에서 5키로메터 거리이다. 이 성은 서북쪽으로 후란계곡을 통제해 북방의 적을 막았고 서남쪽으로 교하·길림·화전을 압박해 동진하는 군대를 차단했다. 동남쪽으로는 돈화시 서북차고성, 모아산고성과 련결되여 군사요충지 역할을 했다. 2013년 '전진고성 유적'이 제7진 전국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였다.

길림 대지에 흩어져 있는 료·금 시대 고성들은 그 격동의 시대를 침묵으로 기록한 유산이다. 이들은 료나라 군사 방어체계의 분포, 형태, 규모 연구 뿐만 아니라 료나라와 녀진족 등 소수민족의 관계 및 통치 정책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길림시박물관


编辑:유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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