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날씨가 싸늘해 지면서 편한 속바지를 찾다가 문득, 아주 오래되어 이제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어 하나가 가슴 깊은 곳을 서서히 데워온다. 그 단어가 바로 ‘게도바지’이다. 그 이름과 함께,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길이 새삼 그리워진다.
7080 그 시절, 내가 자라던 소도시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깊었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북풍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옷깃을 파고들었고, 온종일 몸을 웅크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학교에 등하교와 혹은 꽁꽁 얼어붙은 골목길을 동네친구들과 함께 장난치면서 해맑게 뛰어다니기 위해 게도바지를 챙겨 입던 그 순간, 나는 세상의 추위로부터 든든히 보호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 바지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혹한으로부터 어린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던 어머니의 방패막’이었다.
나에게는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연년생 누나가 있었다. 우리는 매사 티격태격하며 자랐고, 어머니의 작은 관심이나 먹을 것에 대한 소유욕을 두고 은근한 경쟁을 벌이곤 했다. 어머니가 가마솥에서 긁어낸 누룽지를 동그랗게 뭉쳐 주먹밥을 만들어 주실 때면, 나는 슬쩍 누나의 손에 들린 누룽지의 크기를 곁눈질하며 나보다 더 큰 쪽을 받았을까 혼자서 마음을 졸였다. 어머니가 혹여 누나를 더 예뻐하는 것은 아닌지 쓸데없는 서운함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게도바지에서는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공평함으로 존재했다. 겉으로 보기엔 누나는 밝고 고운 실이 조금 더 섞인 바지, 나는 어두운 색이 주를 이룬 바지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 한 올, 코 한 땀에 엮인 정성은 똑같았다. 아이였을 때는 눈에 보이는 색깔의 차이만으로 불평했지만,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똑같이 실을 풀고, 똑같이 삶고, 똑같이 뜨개바늘로 떠서, 누구에게도 덜하지 않은 온기를 담아내려 했던 어머니의 그 ‘공평한 헌신’. 그 평등한 사랑이야말로 나의 유년 시절을 지탱했던 가장 견고한 믿음이었다.
게도바지는 새 옷을 위해 새로 산 실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시 혼성섬유 뜨개실은 공업기술의 낙후로 무게감과 질감의 균형이 떨어지고 염색의 내구성도 약했지만, 저렴하고 화려한 색상 덕분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저렴한 혼성섬유 뜨개실을 통상 ‘게도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 풍요롭지 못했던 살림 때문에 어머니는 새 게도실(혼성섬유)조차 사지 않았다. 대신 버려지거나 낡아 못 입게 된 어른들의 털실 옷을 한 올 한 올 정성껏 풀어 실을 얻었고, 그 실타래들을 다시 모아 대나무 뜨개바늘로 새롭게 엮어냈다. 게도바지는 헌 실에 어머니의 시간과 마음이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러 옷감에서 온 실이 뒤섞여 짜인 게도바지는 마치 조각보처럼 알록달록한 무지갯빛이었다. 어린 내 눈에는 그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투정을 부렸다. "엄마, 이거 이상해. 누나 것보다 내 것이 더 이상해. 너무 알록달록 하잖아요." 철없는 불평을 들으시던 어머니는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셨지만, 결국 어느 날 조심스럽게 짙은 녹색 염료를 구해 오셨다. 그리고 따뜻한 물을 데워 그것을 여러 번 헹구고, 조심스럽게 색을 들이며 "이제 좀 괜찮겠지?" 하고 묻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 녹색은 단순한 염료의 색이 아니라, 자식의 작은 투정 하나까지도 흘려보내지 않으려 했던 어머니의 고요하고 깊은 배려와 마음 씀씀이가 스며든 색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무지개 빛 실 한오리 한오리가 바로 어머니의 시간, 어머니의 따뜻한 정성, 어머니의 노고가 담긴 가장 아름다운 색이었는데도 말이다.
게도바지는 따뜻했지만, 그 실이 가진 특유의 뻑뻑함 때문에 무겁고 탄력이 없어 입고 벗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걷다 보면 두꺼운 직물이 다리에 들러붙어 움직임이 매우 불편했다.
가장 생생한 기억은 한겨울, 밖에서 뛰어놀다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 달려갔을 때였다. 급한 마음에 두꺼운 바지를 제때 내리지 못해 결국 게도바지에 그대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날, 찬 공기와 뜨거운 오줌이 바지를 적시는 열기, 그리고 그 순간의 창피함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선명한 자국처럼 남아있다. 하지만 그 불편함조차 이제는 하나의 아련한 풍경이 되었고, 나의 성장이 새겨진 시간의 단면이 되었다.
게도바지를 뜨기 전, 어머니에게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 헌 옷에서 풀어낸 실은 심하게 꼬불꼬불했기에 꼬인 실을 곧게 펴는 '작업'이 필요했다. 겨울 부엌은 언제나 끓는 솥의 수증기와 삶의 냄새로 가득했다. 쇠로 된 뚜껑을 덮은 조선가마솥, 그 뚜껑과 가마 틈 사이로 힘차게 새어 나오는 뜨거운 김은 우리 가족의 하루를 데우는 집안의 심장과 같았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계신 어머니의 모습은 그저 정갈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 장인의 뒷모습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고불고불 꼬여진 긴 실 타래를 양손에 조심스럽게 들고, 쇠가마 틈으로 새어 나오는 뜨거운 김에 고루고루 쏘여 주셨다. "이렇게 김을 쬐면 꼬였던 실도 신기하게 쭉쭉 펴지는 거란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실이 고르게 펴지도록 천천히 뒤집어가며 김을 쐬셨다. 어머니는 뜨거운 김을 묵묵히 견디며 실을 쐬고 또 쐬셨다. 그것은 우리를 추위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어머니만의 숭고한 헌신처럼 보였다.
해마다 키가 쑥쑥 자라던 우리 오누이의 성장에 맞춰, 어머니는 초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게도바지를 꺼내 밑단을 풀고, 옆 폭을 넓히는 수선 작업을 반복하셨다. 밤이 깊도록 들리던 뜨개바늘의 달그락거림은 우리 집 겨울의 가장 포근한 소리였다. 작은 단추 하나, 코 한땀한땀이 모두 "감기 들지 마라, 춥지 마라"라는 어머니의 말없는 주문이자, 간절한 사랑의 축원이었다.
어느덧 나는 인생의 중반을 넘어 오십대가 되었고, 어머니는 이제 하늘나라에 계신다. 겨울이 오면 당연하다는 듯이 편하고 부드러운 속바지를 꺼내 입지만, 그 매끄러운 직물에서는 게도실 특유의 거친 촉감이나 짙은 녹색 염료의 희미한 냄새를 느낄 수 없다. 다만 추억 속에서 쇠가마의 뜨거운 김과 엉성한 얼룩말 줄 무늬로 뜨개질 된 게도바지가 어머니의 낮은 숨결과 함께 조용히 되살아날 뿐이다.
이제 게도바지는 력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옷,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조차 모를 이름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어머니의 손과 체온, 그리고 풍요롭지 못한 시절을 살아가던 한 여성의 숭고한 헌신이 고스란히 엮여 있던 하나의 기록이다. 게도바지는 단순히 헌 실로 지어진 낡은 속옷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당신의 시간과 마음을 쪼개어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짜낸 온기의 유산이었고, 자식만큼은 춥게 하지 않으려 했던 무한한 사랑의 증표였다. 어머니가 내게 입혀주었던 그 온기가 있었기에, 나는 지금도 마음 한구석의 따뜻함을 잃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게도바지처럼, 어머니의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김영호 프로필
1971년3월10일 길림성 왕청현 왕청진에서 출생
연변과학기술대학 산업기술훈련원, 연변재정무역학교 졸업
현재 한국에서 회사 근무.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