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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전적지 답사]‘어랑촌십삼용사’전적지를 찾아서

안상근      발표시간: 2025-10-02 15:14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풍요롭고 평화로운 기운이 흘러넘치는 어랑촌의 일각

국경절을 앞둔 9월26일, 화룡시 서성진 경내에 자리잡고있는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를 찾았다.

가을을 맞아 울긋불긋 단풍든 아름다운 산천경개와 누렇게 풍년든 연도의 흐뭇한 풍경이 차창으로 안겨들어왔다. 이번 전적지 답사의 목적은 항일전쟁승리 및 세계반파쑈전쟁승리 80돐을 기념하여 력사의 깊은 곳에 간직된 ‘어랑촌십삼용사’의 넋과 얼을 마음속에 새기기 위해서였다.

어랑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어랑촌은 고요한 조선족 마을로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니 마을의 평온함이 더욱 느껴졌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의 모습은 우리가 찾아가려 했던 그 피와 불의 력사와는 커다란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마을 북쪽 산기슭에 높이 세워진 ‘십삼용사기념비’ 앞으로 다가갔다. 현재 세워진 ‘십삼용사기념비’는 지난 2017년10월1일에 화룡시당위와 정부에서 화룡시로혁명근거지건설촉진회에 위탁해 세운 것이였다. 이에 앞서 이곳에는 1957년에 원 화룡현 와룡공사에서 세운 ‘십삼용사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현재의‘십삼용사 기념비’는 203개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산언덕에 거연히 솟아있었고 계단 량옆에는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서 사업했거나 싸운적이 있는 30여명 항일영웅들의 화상과 간략한 소개가 글과 그림으로 전시되여있었다. 정상에 세워진 어랑촌십삼용사기념비 비문에는 어랑촌십삼용사의 비장한 영웅사적과 영웅들의 명부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고 렬사비 바로 옆에는 혁명렬사 김세동지의 묘가 잘 정비된채 안치되여있었다.

우리는 비석 앞에 멈춰서서 묵념을 올렸다. 차가운 비석은 이제 온기를 머금은 듯했고, 그것은 굴하지 않는 령혼들이 90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비석을 스치는 소슬한 가을바람은 귀전을 스치며 마치 당시 전투의 참혹함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듯 싶었다.

비석을 떠나  옥수수가 키높게 자란 당년의 전적지로 향했다. 동행한 력사학자 리광인선생은 마을길 서쪽에 있는 완만한 비탈의 끝자락을 가리키며 저곳이 바로 당년 용사들의 마지막 저격진지였다고 무거운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어랑촌 전적지

1933년2월12일 새벽, 일본 침략자와 위만군 '토벌대'가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를 급습했다. 당시 중공 화룡현위 서기, 마을 적위대 대장 등 주요 간부들이 마을에 있었다. 현위 기관과 마을 주민들의 긴급 대피를 엄호하기 위해 중대장 김세 등을 비롯한  전사들로 구성된 저격 대오는 단호히 마을에 남아, 렬악한 무기로 자신보다 수십 배나 많고 무기장비가 훨씬 우세한 적들과 치렬한 백열전을 벌였다.

연길의 일본수비대 적들을 주력으로 두도구, 이도구, 삼도구, 룡정 등지의 일본군과 자위단의 근 360명에 달하는 적들은 ‘련합토벌대’를 뭇고 이날 새벽 두갈래로 나뉘여 포위공격해왔다. 당시 망을 보던 채동식은 왕집평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듣고 인차 유격대 중대장 김세에게 보고했고 현위에서는 중대장 김세와 정위‘김아주머니’ 등 12명 대원들로 3개 저격소조를 뭇고 적들을 견제하기로 했다. 기타 대원들은 현위서기 최상동의 지휘하에 현위기관과 군중들을 엄호하여 봉밀구방향으로 전이하도록 했다.

새벽의 고요를 깨뜨리는 총성이 울리고 적아간의 치렬한 대항과 전투가 펼쳐졌다. 용사들은 물밀처럼 밀려오는 적을 보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집안의 구들돌을 빼내 방탄벽으로 막고 적들의 포위공격을 한차례 또 한차레 막아냈다. 전투는 새벽부터 오후까지 6시간 넘게 지속되였고 용사들은 물 한방울도 마시지 못한 채 탄약이 바닥나고 지원이 끊겨 결국 모두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 전투에서 용사들은 적 18명을 사살했고 20여명을 부상입혔다.

사료에 따르면, 어랑촌에서 당시 희생된 십삼명 용사들의 평균 나이는 20여 세에 불과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이름과 고향을 가졌지만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고 조국을 지킨다’는 동일한 신념하에 자신의 보귀한 젊음과 생명을 선뜻이 바쳤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적들의 포위토벌을 효과적으로 지연시켜 현위 기관과 대부분 주민들의 대피에 소중한 시간을 벌어주었고 혁명의 불씨를 보존할 수 있었다.

동북항일련군 연구 전문가이며 원 심양군구 《중국군사대백과전서》의 주필인 공령파가 집필한 《동북항일련군사》의 40개 경전전투 사례에는 어랑촌전투가 앞자리에 수록되였다. 공령파는 어랑촌 전투가 시간적인 요소외에도 위험에 대처해 두려움없이 용감히 대적하고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들과 대항하고 중과부적으로 싸웠으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를 견지하였을뿐만아니라 전술운용이 령활했다고 강조, 이는 당이 령도하는 유격대 초기건설시기에는 매우 드문 일이며 전형적인 의의를 가지고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마음이 오래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날 어랑촌의 고즈넉한 평화와 번영이 전적지의 엄숙한 비장함과 대조되면서 머리속에서 내내 감돌았다. 어랑촌 십삼용사들은 력사책에서만 나오는 멀고 접근하기 어려운 상징이 아니라 살과 피가 있고 정과 의리가 있는 젊은이들이였다. 그들 또한 미래에 대한 동경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나라가 위기존망의 긴박한 위기에 처했을 때 망설임 없이 나서서 보귀한 생명으로 기개가 넘치는 호방한 영웅적 서사시를 써낸 것이였다. 전적지 주변의 높고 푸른 산은 충혼을 품고있었고 이들의 공훈을 기록하고 있는 듯했다. 어랑촌십삼용사 전적지는 단순한 지리적 좌표가 아니라 정신의 높은 비석이였다.

화룡시체육장 동쪽에 세워진 십삼용사기념비

내친김에 화룡시에서 지난 1981년8월1일 어랑촌십삼용사의 영웅적 업적을 기리여 화룡시체육장 동쪽에 세운 ‘십삼용사기념비’도 방문했다. 기념비의 비면에는 ‘혁명렬사들은 영생불멸하리’라는 호매로운 글발과 함께 ‘희생된 선렬들 그 뜻도 장하여라, 일월을 휘여잡아 새 세계 이룩하리’라는 의미심장한 글발이 빛나고있었다.

기념비는 평화와 안녕이 깃든 행복한 삶의 터전에 우뚝 서서 후세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평화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며 무수한 선렬들이 피와 생명으로 일구어 낸 것이라고 일깨워주는 듯 싶었다.

력사학자 리광인선생이 어랑촌십삼용사의 사적을 소개하고있다

‘십삼용사기념비’는 연변에 현존하는 341개 혁명렬사기념비중의 대표성적인 기념비로 되고있는바  2025년에는 화룡시의 애국주의 홍색교양코스에 들어 약수동쏘베트유적지 등과 련동적인 교양체계를 형성했다.  길림성박물원의 전문전람에서 ‘십삼용사기념비’모형과 연구성과는 동북항일련군정신을 전시하는 중요한 담체로 되고있다.

현재 어랑촌 십삼용사의 영용함과 굳건한 절개는 렬사비주변에 병풍처럼 둘러서있는 송백처럼 푸르고 기운차 영원히 우리를 격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있다.

/안상근기자


编辑: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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