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산
이웃 나라 라진시가 고향인 아버지는 어린 시절,그 곳 사숙에서 천자문, 삼자경 등 한자를 배웠고 해서(楷书),행서(行书) 등 서법에서도 착실한 기초를 닦았다. 밥술은 뜰 만한 가문이였던지 가족추천으로 룡정은진중학까지 마치면서 그 세월에 드문 유식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청년시절 삼촌을 따라 W현으로 이주, 거기서 어렵사리 사진관과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한개의 축구팀에 맞먹는 식솔 11명을 거느리고 살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유식함과 끈질긴 생활경력이 나에게 여러면으로 충고를 줄수 있는 지식적 기초가 되였다.
아버지가 나에게 준 첫 충고는 자여기인(字如其人)이다.
사람이 면목을 몰라도 글로 서로 대할 수 있기에 글은 꼭 바르게 써야 한다는 것이 실은 명령에 가까운 충고였다. 글쎄 내가 한창 늦깍이 골목대장 노릇에 열중할 때 아버지의 불호령에 눌리워 책상에 마주 앉아 붓으로 영자팔법(永字八法)을 익히려니 그 맛이 죽을 맛이였다. 그것도 하루에 백자, 이른바 일당백자(日当百字)로 말이다. 미완성시 다짜고짜 날아오는 귀쌈처벌, 그 때 어린 나이에 인생을 몇번이고 의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익힌 글(서법)이 아이러니하게도 후날 나의 홍보감이 될 줄이야. 80~90년대 는 무지화(无纸化)시대인 지금과는 달리 모든 정보가 지면(纸面)으로 전달되기에 붓글씨를 잘 쓰는건 하나의 장끼가 아닐수 없었다. H시에서 우리 계통업무와 상관된 표어나 통고 같은 것을 붓글씨로 쓸 일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내가 도맡아 쓰다보니 그 며칠은 손에 먹물이 마를새가 없었다. 이때쯤하면 “글 참 잘 씁니다.”라는 치하는 편지에 문안인듯 빼놓을 수 없는 절차로 된다. 이상하게도 그 때마다 나의 얼굴은 아버지의 귀쌈에서 오던 통증을 준확하게 되풀이한다. 화끈거리는 그 느낌은 참으로 겸연쩍기 짝이 없었다. 정년퇴직전까지 사무실이 여러번 바뀌였으나 어느 사무실테블이거나를 막론하고 문방사보(文房四宝)가 덩그러니 한 자리 지키고 있었는데 이건 자기 과시가 아니고 어릴적부터 굳어진 습관이였다.
아버지의 두번째 충고는 원부일언(怨妇一言)에 오월비상(五月飞霜)이다.
내가 H시로 전근하기 전날 밤,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면서 좀 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워낙은 아버지와 곰사냥도 함께 하던 절친 조포수의 아들 혼사에 관한 진실한 사건이였다. 미남인 조포수의 아들이 몇해간 지내오던 약혼녀를 배반하고 다른 미모의 녀인과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는데 결혼식날 신랑신부앞에, 그것도 배가 남산만한 신부앞을 가로막은 한 녀인이 있었으니 바로 배반당한 원 약혼녀였다. 사람들에게 떠밀리워 가면서 봉두란발의 이 녀인이 눈물 젖은 절규를 발하였다. “너희들 첫 아이를 몽당손에 몽당발을 낳아라!”고 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아주 드라마틱한 명장면인데 기상천외로 몇달 후 조포수의 장손이 정말 그 녀인의 저주마냥 기형아로 태여난 것이다. 내가 과학과 미신 두 개념사이로 생각을 굴릴 때 아버지는 세속적 평가는 략하고 바로 결론을 내린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천력(天力)을 움직일 수 있었겠냐?”
우리 조상들은 자고로 부터 하늘에 대해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살아왔다. 정의의 화신이고 력량의 사자(使者)이다. 누군가가 하늘을 앞세우고 나올 때엔 입을 다무는게 상책이다.
“하늘이 무서운 줄 알아야지!”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평생을 함께 살면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백마디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리 부자의 대화사(史), 80년대초 사천의 화가 라중립(罗中立)의 유화작품 <부친>을 처음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작품속 주인공이 나의 아버지와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이였다. 무섭고 씩씩하던 아버지가 왜소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에는 생명연장 릴레이가 거의 끝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리라. 물론 이 련속과 전승에는 정신적 전달이 내포되여있다.
의례 감탄사가 련발할 그 이야기대목에서 나는 타인의 마음에 못을 박는 일은 절대 삼가하겠노라 조용히 다짐했고 그후 긴 세월 수많은 형사, 치안안건들을 처리하면서도 상대자에게 필요이상의 심리상처를 주지 않도록 많은 신경을 써왔다. 물론 권선징악원칙을 철같이 지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하늘에 대한 경외심에서였으리라!
90년대 중반, 아버지의 산세(伞岁,80세)생일이 다가오기에 정교한 목책을 드리면서 평생을 총화하고 나에게 줄 충고도 명시해주시길 부탁드렸다. 반달이 지나서 내게로 돌아온 목책엔 대서특필 대신에 달랑 한마디가 적혀있었으니 바로 “자고로 인생은 고진감래라고들 하지만 내가 보건대 고생은 장고생이요, 락은 장락이더라.”였다. 맹랑한 마음을 달래고 이 충고의 진미를 리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부귀영화나 생사, 혼인, 자식까지도 어느 하나가 생각대로 되는게 있었던가? 명에 없는 재부를 쫓고 덕에 걸맞지 않는 직위를 탐내다가 결국 손목에 쇠고랑이를 차는 일들이 비일비재인 요즘, 차례진 명대로 사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충고들을 한줄에 꿰보면 이런 말이 된다-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인생의 리력서를 글씨 쓰듯이 한획, 한획 써내려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
이것은 선배가 후배에게 준 조언이고 남자가 남자에게 준 경고였으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충고였다. 나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혹여 홍모일지도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틀림없는 태산이다. 내가 평생을 사고하고 추억해도 배울 것이 많은 정신적 부광(富矿)이다.
2000년초, 86세를 일기로 주무시던 채로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 나의 소년을 당신이 책임졌으면 당신의 로년은 내가 책임진다고 십여년을 혼정신성(昏定晨省)으로 모시면서 아버지와 함께 공유했던 그 세월은 지금 보면 나에게는 최고로 행복한 나날들이였다. 언녕 할아버지가 되여버린 내가 저 세상 신선인 로부를 원고지 우에 올려놓고 왈가왈부하려니 참으로 죄송하기 그지없으나 이렇게라도 아버지를 기리지 않는다면 나 말고 또 누가 아버지의 파란 많은 인생을 기억할 것이며 그이의 충고를 기억한단 말인가?
혹여 이 졸작이 아버지께 바치는 마지막 제문(祭文)이 될가 싶어 저 창문밖을 바라보는 나의 두 로안(老眼)에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고인다.

김춘산프로필
1962년 왕청현 출생
훈춘시공안국 감독수사대대 대대장,
훈춘시인대 민족교포 외사판공실 주임 등 력임.
현재 정년 퇴직.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