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37년(1948년)3월20일부 《길림일보》조문판
올해는 길림성당위 기관지인《길림일보》(吉林日报)가 창간된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10월10일 창간된《길림일보》는 맨처음에는 《인민일보》로 발간되였다. 그런데 《길림일보》의 기나긴 력사행정가운데 조선어로 《길림일보》(조문판)도 발행된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독자들은 많지 않을것이다.
1946년 6월, 국민당은 공공연히 중국공산당과 체결한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동북해방구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진공을 강행하였다. 전면적인 내전을 발동한 국민당군대가 장춘, 길림을 진공하자 중공길료성위(후에 중공길림성위로 개칭)는 이해 8월17일 길림으로부터 연길로 전략철거하게 되였다. 중공 길림성위와 성정부, 그리고 성군구는 당시 연길로 옮겨오면서 중공길림성위 기관지인 《인민일보》도 따라서 연길로 옮겨왔다.
연길로 옮겨온 《인민일보》는 중공길림성위의 지시에 따라 길동군구의 기관지인 《길동일보》와 합병하고 1946년 9월1일부터 《인민일보》 (조문판)을 내게 되였다. 《인민일보》 (조문판)은 초창기에 4절지 4개 면에 주 6회로 출판되다가 그해 11월 4일부터 주 7회로 매일 신문을 발간했다. 주요 보도내용들로는 한문판과 같이 해방전쟁, 토지개혁, 생산건설, 정권건설에 관한 것이였다. 또 한 조선족독자들을 고려해서 당지 조선민족의 각종 문화행사들도 싣는 등 조선문판의 특성도 충분히 살리였다.
《인민일보》 (조문판)은 1947년 3월1일부터 《길림일보》 (조문판)으로 개제발간되였다. 중공길림성위에서 《인민일보》를 《길림일보》로 개제하였기때문이다. 이 신문의 당시 책임자는 《인민일보》의 부주필이였던 림민호와 김평이였다.
중화민국36년 (1947년)2월27일부 《길림일보》 (조문판)
《길림일보》 (조문판)은 해방전쟁시기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조선족인민들의 혁명투쟁을 비롯하여 경제생활과 문화교육 등 일련의 사회생활들을 생동하게 반영하였다. 이시기 《길림일보》 (조문판)은 중국공산당의 로선과 방침을 선전하고 해방전쟁, 전선지원, 토지개혁, 생산발전, 문화건설 등 여러 분야에서의 조선족인민들의 적극적인 활동양상을 적시적이고 중점적이며 생동하게 보도하였다. 그리고 '조선소식'이란 전문적인 주제를 설정하고 조선족들의 관심사로 되여있던 조선국내의 소식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보도하였다. 사용한 문자는 대체로 조한문 혼합으로 되여있으며 문법은 현행문법과 현저한 차이점을 보여주고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기자들의 본적에 따라 여러가지 조선족방언들이 활발하게 사용되였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민족의 언어문화의 다양성 외에도 일제가 장기간 조선민족의 언어문자를 말살하고저 한 식민주의 교육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48년 3월6일 인민해방군이 길림을 수복하자 이해 3월11일 중공길림성위와 성정부는 길림시 교하현으로 옮겨갔다. 이때 길림성위에서는 《길림일보》 한문판만 옮겨가게 하고 (조문판)은 중공 연변지위에 넘겨주었다. 《길림일보》 (조문판)을 넘겨받은 중공연변지위는 기관지로 이해 4월1일에 《연변일보》를 창간하였다.
《연변일보》창간 축하문에서 림춘추는 《길림일보》 조선문판을 언급했는데 다음과 같다.
《길림일보》 조선문판은 길림성위의 옳바른 령도와 길림성내의 군정민들의 성원과 애호밑에서 그 맡은바 임무와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정황의 수요에 따라 끝마침에 대하여 령도하시던 기관들과 《길림일보》사 공작원 여러 동무들에게 뜨거운 경의를 드리는바이다. 오늘 창간되는 《연변일보》는 《길림일보》 (조문판)의 계승자로써 물론 앞서와 같이 당과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충실하게 복무할 것이며 특히 로동자 농민 및 근로인민대중의 절박한 리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분투함으로써 길림성내의 수많은 조중인민의 애호와 지지를 받을 것이다.
1948년4월1일《연변일보》창간을 축하하면서 남긴 림춘추의 창간사
창간사에서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길림일보》 (조문판)의 공적을 긍정한후 새로 창간되는 《연변일보》는 《길림일보》 (조문판)의 계승자라고 강조했으며 이어서 기왕과 마찬가지로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충실하게 복무해야 한다고 피력하고나서 《연변일보》가 대중의 계급적 리익을 옹호하며 조한 두 민족의 형제적 우애와 단결을 도모하고 연변건설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새로 창간된 《연변일보》는 당시 창간호 제호 왼쪽에 사고를 실었는데 내용은 《길림일보》(조문판)를 구독하던 독자들이 《연변일보》를 구독하자면 각지 우정국에서 가서 신청하고 모든 원고와 편지를 직접 본사에 부쳐달라고 알리고 있다. 이로부터 《길림일보》(조문판)이 《연변일보》의 창간과 함께 력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연변일보》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종합해보면 《길림일보》 (조문판)은 중공길림성위 기관지인 《인민일보》에서 1947년 3월1일에 《길림일보》 (조문판)으로 개제발간한후 1948년 4월1일 《연변일보》가 창간되기까지 약 1년여 시간동안 발간되였다.
/안상근 기자
注:본기사는 《연변일보50년사》 《연변일보》창간호 《중국조선족언론사》《중국조선족사료전집》의 신문잡지편 조문판 1권 등을 참고로 구성했음.
编辑:김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