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훈춘현위 창립지 안내비
훈춘시 영안진 북부에 위치한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는 훈춘현성에서 90여리 떨어진 산구에 자리잡고 있다. 연길에서 이곳에 가려면 '연길-량수-밀강-중강자-대황구', '연길-훈춘-영안-대황구' 두갈래 코스가 있다.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는 중강자, 삼안, 상중구, 청수동, 황구, 동구, 북구, 대빈류구, 소빈랑구, 서대마구, 양목교자 등 자연툰이 포함되는데 당시 주민은 1000여명이였다고 한다. 1930년 10월, 중공훈춘현위가 청수동에서 성립된 후 대황구는 현위기관의 소재지로 되였다. 훈춘현위는 군중을 발동하여 반일회, 농민협회, 부녀회 등 반일군중단체를 건립하고 '춘황', '추수'투쟁을 진행하고 1932년 9월, 각지의 무장대오를 집중시켜 훈춘현 령남유격대(연통라자항일유격근거지)와 령북유격대(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건하였는데 이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의 면적은 1000평방킬로메터에 달했으며 1934년 가을까지 항일투쟁을 견지하다가 혁명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왕청현 금창지구로 전이하였다.
중강자사건 발생지 안내비
2004년 4월에 길림성문물보호단위로 되고 2011년 중공길림성위가 명명한 중공당사교육기지로 된 이 혁명유적지에는 '중강자사건발생지'(중강자촌), '중공훈춘현위 성립지', '13렬사릉원'(대황구촌), '황구쏘베트정부성립지', '대황구봉기(기의)', '복장공장유적', '근거지병원유적' 등이 있으며 2017년에는 '훈춘시당사전람관'이 건설되여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접대하고 있다.
그중 '대황구봉기'는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가 전이한 후인 1935년 4월초에 발생한 사건이여서 그 내막을 상세히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나 그 의의는 매우 심원하다.
당시 대황구에는 항일부대에 대한 ‘토벌’에 참가하였던 위만군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매국역적이며 한간인 장해붕의 26려 35퇀 1영 1련이였다.
1935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후에 동북항일련군) 제2군 독립사는 사, 퇀 간부를 조절하였다. 후국충(侯国忠, 1904년에 대황구에서 출생. 1932년 24명의 괴뢰군 사병들을 거느리고 항일산림대를 조직한 후 훈춘유격대에 가입, 련장, 퇀참모장, 부퇀장, 퇀장, 부사장을 거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 부지휘로 임명되였다가 1939년 8월 24일 대사하전투에서 희생됨.)은 제4퇀 부퇀장으로 임명되였다.
4월초의 어느날, 그가 부대를 거느리고 훈춘에서 왕청현으로 가게 되였다. 대오가 대황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대황구에 주둔하고 있는 괴뢰군 련장 조옥새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조옥새는 “소인이 부대를 거느리고 동만에 와서 토벌에 참가한 것은 핍박에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군에 자기의 처지를 량해해 줄 것을 바랐고 만약 우리 군이 자기 방어구역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절대 우리군과 교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조옥새는 일본군에 불만정서가 있었으며 그의 병사들도 항일대오와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연변혁명렬사관내 혁명기념관에 전시된 후국충렬사의 사진.
토론을 거쳐 이 괴뢰군을 쟁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후국충은 부대를 거느리고 대황구를 포위하였다. 어느날 아침 한 괴뢰군 사병이 아군 진지에 뛰여들었다. 장택민(蒋泽民, 1913.2.27-2012.6.17)이라고 부르는 이 사병은 아침 단련을 나왔다가 우리군이 매복한 것을 모르고 뛰여든 것이다. 혁명군의 조선족전사들이 “손들엇!”하고 외쳤으나 장택민은 알아듣지 못하여 벙벙해하였다. 한족인 후국충이 그와 담화를 나누었다. 후국충은 자기가 기의하여 공산당유격대에 가입한 사실을 곁들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과 항일구국에 관한 당의 정책 등을 선전하고 조옥새에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쓴후 그에게 주어 돌려보냈다.
이어 후국충은 대오를 지휘하여 괴뢰군에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전사들은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치지 않는다!”, “망국노는 수치스럽다!”, “량심이 있는 중국사람은 총부리를 돌려라!” 등 구호를 외치고 동북인민혁명군이 창작한 기의노래를 높이 불렀다.
엄밀한 군사포위와 정치공세하에 괴뢰군은 무거운 압력을 느꼈다. 괴뢰련장 조옥새는 민족대의를 위해 각 패장과 상의한 후 후국충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담판하자고 소식을 전했다. 후국충은 이 괴뢰군을 쟁취하기 위하여 개인의 안위를 뒤로 한채 몇몇 전사를 거느리고 괴뢰군 군영으로 내려갔다.
그는 조옥새에게 어둠을 버리고 밝은 길로 전향할 것을 권유하고 열정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항일정책을 선전하면서 그들이 항일애국행렬에 참가할 것을 희망하였다. 이때 장택민을 비롯한 사병들이 련부에 몰려오면서 “우리는 망국노가 되지 않겠다!”, “항일군에 참가하자!” 등 구호를 외쳤다. 이 정경을 목격한 조옥새는 최후의 결심을 내리고 전련의 기의를 선포하고 전련을 이끌고 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 가입하였다.
그후 127명의 이 부대는 5개 련으로 재편성되여 제2군 4퇀의 력량을 대대적으로 강화시켰다. 일본침략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사건은 당시 훈춘은 물론 전 동북을 들썽하게 하였으며 항일군민들의 항일신심을 북돋아주었다.
훈춘시당사전람관에 전시된 장택민의 사진과 소개.
대황구봉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택민은 그해 5월의 도금창겁차전투, 6월의 괴뢰정안군섬멸전투, 8월의 라자구전투 등 전투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으며 12월에는 당의 파견으로 모스크바동방대학에서 기계와 군사를 학습하고 1939년 2월, 연안에 돌아와 모주석의 보위참모로 사업하다가 1942년 1월 중경판사처에 조동되여 주은래의 부관으로 사업하였다. 1948년 4월에는 동북민주련군(제4야전군 전신) 후근부 자동차3퇀 퇀장으로 임명되여 해방군 첫 땅크부대를 이끌고 료심전역, 평진전역에 참가한 후 1949년 3월에는 100대의 자동차부대를 이끌고 서백파에 가 모주석과 중앙 수장들을 북경에 호송해왔다. 그는 해방후 자동차부대를 이끌고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선후로 심양군구후근부 차선(车船部)부 부부장, 생산부 부장을 력임하다가 1978년 11월에 총후근부 차선부 부부장으로 사업하였다.
90여년전에 일본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던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찌 한두개에 그치랴?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