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옥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은 룡정현 의란공사 춘흥대대이다. 이 두메산골의 흑토지에서 태어나 유치원부터 소학교, 중학교까지 줄곧 다녔다. 내 삶의 든든한 뿌리는 이 시골 마을의 흙내음 속에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나는 전 공사의 학생 대표로 선발되어 현소재지인 룡정으로 회의를 다니기 시작했다. 농촌 구석에서 현성으로 떠날 때면 마치 해외려행을 떠나는 듯 가슴 벅찬 설렘과 기대를 억제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룡정행차에 나섰던 날의 격동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전 공사에서 단 4명의 학생 대표가 선발되였는데 그 명단에 내 이름이 포함된 것이였다. 시골에서 자란 철부지 아이가 현성으로 회의를 간다고 하니 온 집안과 동네가 들썩였다. 어머니는 내가 알면 극구 만류할가 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동네방네에 은근히 자랑을 펴놓았다. 나는 어머니가 그러시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쑥스러워 매번 현성으로 떠나기 직전에야 겨우 행차를 알려드리군 했다.
우리 일행이 현성에 도착했을 때 느낀 감흥은 지금 수도 북경의 땅을 밟는 것보다 더 신비롭고 황홀했다. 첫날, 현초대소에 숙소를 정한 뒤 시가지를 거니는데 쭉 뻗은 신작로와 으리으리한 벽돌집들, 그리고 붐비는 인파는 마치 별세계에 온 듯한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 화려한 풍경 뒤에는 가슴 아린 가족의 현실도 있었다. 당시 오빠는 룡문교 공사장에서 고된 로동을 하고 있었다. 회의 짬을 내여 땀먼지 자욱한 공지로 오빠를 찾아갔던 날, 자갈더미 사이에서 마주한 오빠의 얼굴은 고된 체력로동으로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어린 녀동생의 마음에도 그 모습이 애절하게 맴돌아 객지에서 만난 반가움보다 안타까움이 앞서 코끝이 찡해졌다.
그 슬픔을 잠시나마 달래준 것은 현 초대소의 밥상이였다. 시골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어렵던 풍성한 음식들이 점심때마다 가득 차려져 농촌 구석에서 이런 음식을 접한다는 사실이 신기하여 회의 중에도 점심시간을 고대하군 했다. 한 번은 조양천진에서 회의가 열렸을 때인데, 공교롭게도 치통이 너무 심해 음식을 앞에 두고도 죽만 끓여 먹어야 했다. 성장의 기억은 이렇듯 늘 달콤함과 쓴맛을 동반하는 법이다.
내가 가장 잊지 못할 영광과 행운의 순간은 1970년대 초의 어느 겨울날 찾아왔다. 그때도 회의 차 룡정에 갔다가 당시 연변 전역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명성을 떨치던 모주석저작학습 적극분자이자 표병인 황순옥 선생님과 한 침실을 쓰게 된 것이였다. 룡정현 동성공사 출신인 그 분은 당시 살아있는 전설이였고 어린 나에게는 하늘의 별과 같은 우상이였다. 나와 한방을 쓰게 된 선생님은 년세가 지긋하심에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나를 마치 친자식처럼 따뜻하게 보듬어주셨다. 고즈넉한 초대소 방 안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자신의 인생담을 도란도란 들려주시기도 했다. 내가 이 소중한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수줍게 종이를 내밀자 선생님은 펜을 들어 정성스레 격려의 서명을 남겨주시였다. 헤여질 때는 친자식에게 당부하듯 꼭 조국의 훌륭한 기둥이 되라며 내 단발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셨는데 그 손길의 온기는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몸에 따스하게 남아 있는 듯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자한 선생님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여 이 소식을 가족에게 어떻게 전할까 골몰했다. 집 문턱을 넘자마자 부모님께 누구와 한 침실을 썼는지 맞춰보시라며 신이 나서 소식을 전했다. 동성공사의 전국 표병 황순옥 선생님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을 밝히자 아버지는 너무도 격동된 나머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셨다. 우리 가문에 이런 영광이 생겼다며 대견해하셨고 투박한 손으로 나의 어깨를 오래도록 다독여 주셨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만 14세가 되자마자 전교에서 처음으로 공청단조직에 가입했다. 이를 시작으로 학교 공청단 지부 서기, 전 공사의 유일한 학생 공청단 위원, 전교 및 공사 홍대회(红代会) 주임, 현 홍대회 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방과 후에는 늘 동급생들을 조직하여 렬군속 할머니 댁을 찾아가 밥을 짓고 물을 길어드리고 땔나무도 해다 드리군 했다.
한 번은 반주임 선생님이 나를 현성 회의에 참석하도록 직접 지명한 적이 있었다. 무척 기쁜 일이였지만,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거치지 않고 선생님 혼자 결정하여 가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며 한사코 거절하기도 했다. 후에 선생님이 재삼 설득한 후에야 겨우 응하여 참가했을 정도로 나는 매사 곧고 바르고자 노력했다. 매번 현성에 가면 다른 학교 교장 선생님들까지 나를 알아보고 귀여워해 주시며 미소를 보내주셨다. 전 현 학교 계통 대표대회에서는 학교와 공사를 거쳐 현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선발된 유일한 학생 대표로 뽑혀 대회 발언을 맡는 뜻깊은 영광도 가졌다.
여러 직책을 맡고 분주히 활동하면서도 내 인생의 가장 든든한 뿌리는 여전히 흑토지에 있었다. 새벽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길가에서 두엄을 주었고, 방과 후나 방학 때면 생산대에 나가 김매기와 모내기, 가을걷이 등 집체 로동에 빠짐없이 참가해 잔뼈를 굳혔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성실하고 직심으로 했다. 김을 맬 때면 남에게 뒤지는 것이 싫어 기어이 맨 앞에서 땀범벅이 되어 호미질을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고야 만다는 강인함이 내 성미였다. 가끔 밭으로 일하러 갈 때면 소등에 올라타 밭을 오가기도 하고 소수레를 제법 몰고 다니기도 하여 주변에서 ‘무쇠처녀(铁姑娘)’라 불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간고한 환경 속에서 힘들게 보냈던 어린 시절이였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유했다.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많은 이들의 격려와 사랑 속에 가슴 벅찬 날들을 보냈기 때문이다. 농촌의 흙내음 속에 발을 딛고 시선은 더 넓은 현성과 미래를 향해 두었던 그 시절, 이러한 경험 속에서 내 가슴속에는 원대한 포부가 싹트기 시작했고 학문에 대한 열망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마침내 대학입시 제도가 회복되여 77년급 첫 대학생이 된 나는 화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평생 화학 분석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파며 교수급 고급공정사로 일하다 정년을 맞이했다. 정년퇴직은 제2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다. 연길시 공업발전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퇴직 후에도 여열을 남김없이 발휘하며 뜨거운 열정으로 사회에 적극 기여하고있다.
돌이켜보면 현성으로 회의하러 다니던 시골마을의 단발머리 소녀가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기에 마음속에 세운 포부와 인생설계도가 있었기에 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삶의 잊을 수 없는 첫 페이지였던 그 현성으로 다니던 중학 시절을 되새기노라면, 글로 수놓아가는 나의 황혼 인생은 더욱 감개가 무량해진다.

최정옥 프로필
연변대학 화학학부 졸업
화학분석 고급공정사
연변작가협회 회원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