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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이야기33] 연변교육학원에서 진수하던 나날들

안상근      발표시간: 2026-06-08 11:44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유미화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늙으면 추억으로 산다"는 말처럼, 집청소를 하다가 서랍에서 색바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순간 기억이 날개를 돋친 듯 나를 30년 전으로 데려갔다.

그때 나는 도문시제 5중학교에서 가장 젊은 반주임이였다. 한창 피끓는 25 살 한창나이였고 50명이 넘는 학생들을 맡아 열정과 패기 하나로 밤낮없이 달리던 시절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교장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교장실로 불렀다. 평소와 달리 엄숙한 표정에 나는 긴장하며 자리에 앉았다.

“길림성에서 각 학교 교원들의 업무 자질을 높혀주기 위해 우수한 교원을 한 명씩 뽑아 교원 실무 제고 진수를 보내기로 했어요. 학교를 대표해서 유선생님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시던 교장선생님이 웃으며 덧붙였다.

“3호 학생증을 받아와야 해요. 못 받으면 학교에 돌아오지 마세요.”

롱담처럼 들렸지만 그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3호 학생증은 당시 우수한 성적으로 연수를 마친 이에게만 주는 증서였다.

이틀 뒤, 나는 연길에 있는 연변교육학원에 도착했다. 수속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번 공부가 내가 생각한 일본어만이 아니라는 점이였다. 수학, 물리, 화학, 어문, 일본어까지 다섯개 과목, 학생은 300명 정도였고 그중 일본어 반은 57명이였다. 전 성에서 모인 우수교원들이라는 자부심에 모두들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였다. 내가 훈춘시 제5중학교에서 일본어 교원으로 사업할 때 교장으로 계셨던 양관섭 선생님이였다.

양관섭 교장님은 반가움에 내 손을 덥썩 잡아끌며 교장실로 안내했다. 1985년에 훈춘시 5중을 떠났으니 꼭 10년 만의 만남이였다. 교장님은 내가 떠난 후 바로 연변교육학원 원장으로 발탁되였다고 했다.

“유선생, 참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교장님은 우리 아버지와도 친분이 있던 터라 나는 더욱 반가웠다. 4년 동안 함께했던 그 시절, 교장님은 항상 젊은 나를 믿고 사업을 맡겨주셨다. 재미있는 이야기꽃을 피우다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여 일어서려는데 교장님이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유미화 선생, 그전에 내가 교장 할 때 유선생님이 단위와 정치교도조를 책임진 교도주임으로 일을 잘해서 길림성문명교원이 되여 학교의 자랑이 되었지요. 이번에도 잘해 보세요.”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교장님의 기대에 부응하리라 다짐했다.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쉬웠다. 일본어 과정은 정독, 일본력사와 세계력사, 일본어문법, 일본어교재 분석 등이였는데 나는 수업 시간에 기본상 다 소화할 수 있었다. 매일 오후 3시면 수업이 끝나고 그 후는 자유시간이였다.

갑자기 생긴 자유 시간이 낯설 만큼 한가했다. 집에 있을 때는 아침마다 아이를 정신없이 유치원에 보내고 출근하면 반주임으로서 할 일이 산더미였다. 저녁에는 일본어 승학 지도를 하고 밤늦게까지 다음 날 교수안을 쓰느라 밤 12시 전에 잠자리에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이 자유는 마치 휴양 온 듯한 느낌이였다.

며칠 후, 매하구, 교하, 훈춘 등지의 선생님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하고 연길서시장 구경을 나갔다. 저녁 6시경이라 시장은 파장 무렵이여서 별로 볼거리는 없었다. 그냥 어슬렁거리는데 눈에 띈 것은 무도장이였다.

“우리 들어가 볼래?”

누군가의 제안에 여섯 명은 표를 사고 무도장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온 우리에게 화려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은 별세계처럼 보였다. 우리의 행동이 당돌해 보였는지 청하는 춤군들이 많았고 우리는 모두 춤판에 나섰다.

나는 원래 춤을 잘 췄기에 어떤 곡에도 바로 맞출 수 있었다. 신나게 춤추며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모두 풀었다. 모두가 흥분에 싸여 놀다 보니 어느새 무도장이 닫는 시간이 되였다.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보며 학교로 돌아왔다.

그렇게 우리 '6인방'은 열흘 남짓 저녁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무도장으로 달려갔다. 낮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밤에는 신나게 춤추며 그 시절을 불태웠다.

그런데 열흘 후, 양관섭 교장님이 나를 찾았다. 무슨 일일까 하며 교장실로 가자 교장님이 물으셨다.

“요새 일본어반에서 녀성 선생님들이 무도장에 다닌다고 하던데 미화 선생님도 다니는가요?”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내 표정을 보며 부드럽게 웃으셨다.

“내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어요?”

그러면서 교장선생님은 현재 일본어반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다른 반은 별 차이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지만 일본어반은 자습해서 일본어 교원이 된 분들이 많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해 문법을 리해하지 못하고 랑독 실력도 너무 차이가 나서 중학교 일본어 교원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였다.

“이걸 빨리 돌려세우지 못하면 그냥 시간만 보내기 쉽고, 앞으로 일본어 교원으로서 일하기도 힘들 겁니다. 저녁에 이 선생님들을 지도해 줄 수 없겠어요?”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선생님의 기대와 함께 나보다 더 필요한 동료들을 생각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였다.

그날부터 나는 무도장을 접고 무보수 지도를 시작했다.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배우는 선생님들은 열 명이였다. 그런데 그분들의 열정이 어찌나 대단한지 힘든 줄도 모르고 가르쳤다. 졸업하는 날까지 계속되였다.

단순히 글만 배우면 흥미를 잃을까 봐 중간 휴식 30분 동안은 일본춤도 가르쳐주고 조선무용도 배워주었다. 그러니 누구나 저녁이면 빠짐없이 참가했다. 두 주일에 한 번씩 집에 다녀올 때면 서로 맛있는 것을 가지고 와서 공부가 끝나면 맥주에 웃고 떠들며 하루의 피곤을 날렸다.

일요일이면 배구, 탁구, 롱구 등 체육활동으로 즐겁게 보냈다. 그렇게 일 년 반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교육학원에서 진수하던 시절 선생님들과 함께(뒤줄 왼쪽 두번째가 필자)

졸업할 때 한 반에서 두세 명씩 3호 학생증을 선출했는데 나는 당당히 선발되였다.

퇴직 후 집에 조용히 있을 때면 항상 그 시절을 회상하군 한다. 그분들도 나처럼 그때를 기억할가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위챗동아리에 계신 분이 나와 통화를 요청해왔다.

“유 선생님, 저 그때 선생님과 함께 공부했던 선생입니다. 그때 그 재미있던 일이 잊혀지지 않네요.”

그리고 또 한 분이 스마트폰으로 련락이 왔다. “우리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좋겠어요.”

그렇다. 세월은 흘러도 따뜻한 마음이 모인 우리들의 즐거움은 영원히 가슴에 남는다. 연변교육학원에서 진수하던 그때 그 시절, 젊음과 열정이 넘치던 나날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그리움과 정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사진속 그리운 얼굴들을 보며 나는 오늘도 미소 짓는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했으니까. 그리고 그 추억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유미화 프로필

1961년 훈춘시에서 출생

연변사범학교 일본어 전업 전공

훈춘시제5중학교와 도문시제5중학교에서 사업하다가 퇴직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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