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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이야기31]향기로 피여나는 인연

안상근      발표시간: 2026-06-01 16:30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한경애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만남으로 시작된다. 부모, 형제, 이웃, 친구, 선생님, 동료…… 수많은 사람과 만나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어느 날, 외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청소기를 돌리는데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라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한경애 전화 맞는가요?"

"네, 맞는데요. 누구신지?……"

"아, 맞구나. 내 누군지 기억 안 나겠지? 나 최승화 선생님이다."

아득히 먼 기억 속에서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나의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셨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전화에 반가움이 앞섰다.

청도에 있는 동창생에게서 내 전화번호를 알게 되셨단다. 다음날 대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1984년, 오상사범학교에 입학한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에 만나서 알아볼가 걱정했는데 대림역 11번 출구에서 선생님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무정한 세월이 얼굴에 수많은 흔적을 새겼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 앉으니 이야기가 거침없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45년 전으로 돌아갔다.

내가 태여난 마을은 흑룡강성 해림현 시하진 동풍촌, 2백 세대 남짓한 작은 시골마을이였다. 마을에 학교가 7학년까지 있었지만 졸업하면 8리 떨어진 한족 중학교에 가거나 생산대 일을 하는 것이 규례였다. 그런데 내가 소학교를 졸업한 해에 학교는 5학년까지만 남게 되였다. 나는 한족말을 배우기 위해 앞마을 한족학교에 가서 4학년과 5학년을 다녔다. 그때 창식이가 녕안조선족중학교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가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공부하려는 자식은 동냥을 해서라도 시켜야 한다며 개학한 지 한 달 만에 나를 해림현조선족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때 중학교에서 배우는 외래어는 일어였다. 해림현 근처 조선족소학교에서는 이미 일어를 1년 배웠기에 애들은 과문을 줄줄 읽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우에오' 한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눈 뜬 소경이였다. 너무 막막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인 최승화 선생님이 우리 학년 일어를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오후 방과후면 나에게 한 시간씩 개별 지도를 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무상으로 1대1 지도를 해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지도를 받으며 복습한 결과 첫 월고에서 73점을 맞았다. 선생님은 전반 학생들 앞에서 나를 칭찬하며 귀감으로 삼아주셨다.

최승화(앞줄 가운데)선생님과 함께 남긴 졸업사진

막 제대하고 학교에 배치받은 최승화 선생님은 그때 28세 총각 선생님이셨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격이 서글서글하여 학생들이 많이 따랐다. 동경성에 있는 선생님 부모님댁과 친척집에 재워가며 학생들을 경박호 유람을 시켜주신 분이셨다. 그래서 우리 학급은 전교의 부러움을 샀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밤이였다. 잠결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 눈을 떠보니 숙소 아궁이 쪽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누군가 "불이야!" 하는 소리에 모두 자리를 박차고 깨여났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세수할 물이 있어 금방 불은 껐지만, 그때 내가 벗어놓은 솜옷이 절반이나 타버렸다. 한 벌뿐인 솜옷이 반이나 탄 것이였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져 울음보를 터뜨렸다. 담임선생님은 학급 친구들을 동원하여 나에게 새 솜옷 한 벌을 사주셨다. 하늘색 바탕에 흰 물방울 무늬의 그 솜옷 덕분에 그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중학교 3년 동안 우리 집은 늘 량표돈을 맡아서 나의 뒤바라질을 하였다. 집 형편을 잘 아는 나는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여쭈었다. "선생님, 저희 집 형편에 고중공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등사범학교 시험을 보게 해주십시오."

우리 학급에는 36명이 있었는데 중등사범학교 명액이 3개뿐이였다. 그런데 그 명액이 나에게 돌아올 줄이야! 졸업시험이 끝난 후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목단강조선족중학교에 가서 오상사범 면접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선생님은 반장 해자와 함께 오상사범 입학통지서를 들고 직접 우리 집까지 찾아오셨다. 셋 중에서 나만 합격했다. 선생님은 우리 어머니 앞에서 딸을 어떻게 그렇게 잘 가르쳤느냐고 칭찬만 하시다가 기차 시간에 쫓겨 따뜻한 밥 한 끼 대접도 못 받고 돌아가셨다. 그 당시 해림에서 우리 집까지 오려면 목단강에서 환승하여 시하진에서 내린 후 8리 길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찾아 오셨는데 식사 한 끼 대접 못하고 차비도 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린다.

한 사람의 작은 미소가 다른 이의 하루를 밝혀줄 수 있고 한 번의 결정이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다. 만약 42년 전에 최승화 선생님이 나에게 중등사범학교 시험 명액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가? 나는 교원 사업을 사랑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였지만, 매일 교단에서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날마다 사업과 삶에 애착을 가지게 되였다. 중한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 교원들이 교단을 떠날 때 나도 잠시 흔들렸으나 학생들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였고, 결국 35년이란 긴 세월을 교단에 바쳤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내가 한평생 소학교 교원으로 보람차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은사 최승화 선생님과의 소중한 인연 덕분이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 같다. 혼자인 것 같지만 아프거나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항상 손을 내밀어주는 인연들이 있었다. 오늘도 오래도록 향기가 머무는 그 인연들에 감사할 따름이다. 꽃향기는 꽃이 지면 끝나지만, 인연의 향기는 영원하다.

나도 누군가의 삶에 향기로 피여나는 인연이길 바란다……

한경애 프로필

1988년 흑룡강성오상조선족사범학교 졸업

목단강조선족소학교에서 사업하다가 퇴직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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