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吉林朝鲜文报-吉林省委朝鲜文机关报
● 国内统一刊号: CN22-0030 邮发代号: 11-13
길림신문 > 기획

[그때 그 이야기24] 50원과 2원, 그리고 밤도와 헤쳐나온 10리길

안상근      발표시간: 2026-05-06 15:01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리영린

61년전이였던 1965년 여름방학, 나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룡강성 경안현 흥산림장에 품팔이를 가게 되였다. 하는 일은 묘목밭 김매기와 옮겨 심은 묘목의 벌초, 그리고 솎아내기 작업이였다. 한 달 동안 일하면서 가시에 찔리고 풀에 베이면서 팔다리는 성한 데 없이 만신창이가 되였다. 모기에 물리고, 무더운 여름 땡볕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하는 일은 정말 고역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한 덕분에 한 달간 식비를 제하고도 50원이나 벌었다. 그때 50원은 큰돈이였는데 한 학기 학비와 식비를 해결할 수 있는 거금이였다. 내 손으로 학비를 벌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돈이 없어 학교를 못 갈 번했는데 막상 학비를 마련하고 나니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분좋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그런데 갈 때까지만 해도 100메터쯤 되던 강폭이 이틀째 내린 장마비로 300메터가 넘는 큰 강으로 변해 있었다. 갈 때는 강을 건너는 삯이 50전이였는데, 돌아올 때는 강폭이 넓어져 배줄을 쓸 수 없고 노를 저어야 한다며 2원을 내라고 했다. 하루 품삯이 2원이였던 터라 너무 비싸다고 생각한 나는 학생임을 강조하면서 돈이 없으니 좀 깎아 달라고 사정했지만 험상궂게 생긴 배사공 령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헤엄쳐 건너가기로 마음먹었다. 옷을 묶어 머리에 이고 허리띠로 고정한 채 강물에 들어섰다. 강 한가운데쯤 헤엄쳐 오니 기력이 다해 더 이상 팔을 움직일 수 없었고 몸이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물도 몇 모금 들이마시면서 '이제 정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그래도 죽기 살기로 허우적거리는 사이 머리에 매였던 옷이 벗겨져 떠내려갔다. 더 이상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물살에 떠내려가는데 순간 발에 무엇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힘을 모아 온 힘껏 밟고 올라서니 그것은 강가의 큰 나무였다. 간신히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고 한참을 쉰 뒤, 20여메터를 더 헤염쳐 모래톱에 올라와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이 들어 하늘을 보니 오후 세 시쯤 되여 보였다. 나는 완전히 알몸이 되여 있었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돈마저 모두 강물에 떠내려간 뒤였다. 정말 막막하고 기가 막혔다. 발가벗은 몸으로 한낮에 3개나 되는 동네를 지날 수 없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강가에서 생산대 소와 말, 돼지를 방목하는 한족 아저씨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분은 비 올 때 머리에 쓰고 평소에는 앉는 데 쓰던, 수십 군데 구멍 난 헌 마대자루를 하나 건네 주었다. 나는 풀을 뜯어 새끼를 꼬아 허리띠를 만들고 방목군이 준 마대를 치마처럼 둘렀다. 머리는 제때에 리발하지 못해 봉두란발이였고 한 달 넘게 햇볕에 타고 까칠까칠해져서 '검둥이'나 다름없는 야인 모습이였다.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는데, 여름철의 해는 밤 열 시가 다 되여서야 완전히 어두워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밤이 되자 굶주린 모기떼가 벌거벗은 나를 얼마나 맹렬히 공격했는지 모른다. 특히 마대 치마 속으로 파고들어 무차별 이곳저곳 물어대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떠날때 아침을 먹은외 밤 열 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쓰러질 듯이 고팠다. 비 온 뒤 질척거리는 길, 이산툰, 루자강, 판자강 세 동네를 지나는 십 리 길이 아직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산툰 동네 밭으로 숨어 들어가 오이 두 개와 도마도 몇 개를 훔쳐 먹었다. 그제야 조금 힘이 나서 동네를 지나가는데 당시 동네길은 소나 말, 돼지를 새벽에 한데 모아 방목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터라 길마다 짐승들의 분변으로 가득 깔려 있었다. 맨발로 걸어오는 내 발가락 사이로 분간할 수 없는 것들이 수없이 뿜어 올라왔다.

알몸의 야인 같은 모습이라 사람을 만날가봐 두려워 인기척만 들리면 길 옆에 숨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걸었다. 개를 많이 키우는 동네 입구의 개가 짖어대자 온 동네 개들이 떼를 지어 요란하게 짖어댔다. 사람도 피하고 개도 피하느라 세 동네 십 리 길을 두 시간 넘게 걸려서야 겨우 집에 도착했다. 이를 악물고 걷고 또 걸어, 집 앞에 이르러 나는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한밤중에 야인처럼 벌거벗고 돌아온 나를 보신 아버지도 기막혀 우시였고 나도 슬피 울었다. 내 은사이신 반주임 리순자 선생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태만옥 교장선생님께 자세히 말씀드렸다. 운동 잘하고 공부 잘하며 반장이였던 내가 여름방학에 학비를 벌러 외지에 갔다가 당한 봉변을 낱낱이 전하자 나는 1등 조학금을 받는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이 기회를 빌어 리순자 선생님과 이미 돌아가신 태만옥 교장 선생님께, 비록 늦었지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룰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단돈 2원이 아까워 린색하게 굴다가 목숨을 잃을 번한 모험을 한 셈이였다. 하지만 그 시절 2원은 학교의 열흘치 식비였다. 기장밥 3냥에 3전, 배추국 한 그릇에 2전, 한 끼에 겨우 5전 안팎이던 시절이였다. 

그 시절에는 품팔이할 곳 조차 드물었다. 우리 형님이 사이좋게 지내는 림장주임에게 간청해서 겨우 얻은 일자리였고 어린 나이에 너무나 힘들게 번 돈이였다. 그때 그 시절,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며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다. 지금 와서 그때 이야기를 꺼내면 적잖은 젊은이들은 믿기 어려워 할수도있겠지만 지난세기 5, 60년대 우리 세대 사람들은 분명히 그렇게 어렵고 힘든 세월을 버티고 살아왔다.

61년전의 그때 그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단단하게 만든 뼈대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날의 나는 정말 우습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잊지못할 뼈저린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가난이 무엇이고, 생존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인지 몸으로 배웠던 것 같다. 


编辑:안상근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