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영실
나는 《길림신문》을 지금까지 이미 38년동안 애독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로년에 이르기까지 함께 성장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길림신문》이 이처럼 나의 미음을 끌어 당긴 것은 종합지로서 여러층 독자들의 수요에 맞추어 잘 꾸려지기때문이다. 취미성이 강하고 정책성이 강하고 믿음직하기에 읽을 맛과 멋이 있다 .
돌이켜보면 30여년의 《길림신문》 구독생애에서 나는 더욱 성숙해졌고 시야가 넓어졌다.
신문을 열독하면서 87년도부터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 이젠 손에서 필을 놓을수 없게 되였다.
그때에는 메일로 원고를 보낼수 없을때여서 봉투에 원고를 넣어 우편으로 부치던지 혹은 직접 원고를 신문사에 가져가기도 하였다. 연길시 동쪽 목욕탕옆에 2층사무실에도 원고를 가져간 적이 있었다.그때 량고범 등 편집일군들은 언제가도 반갑게 맞아주어 언제나 신나는 걸음이였다.
나는 1987년도부터 지금까지 선후로 《길림신문》 등 많은 보도 매체와 《연변문학》연변인민방송국 등 여러 잡지와 방송들에 1,200여편의 소식, 통신 ,수필, 생활수기, 칼럼 등을 발표하였다.
1988년 10월 13일 《길림신문》에 실린 <세계우정일을 기념>이란 소식보도를 시작으로 몇백자밖에 안되는 작은 소식보도들을 쓰던데로부터 그후에는 만자좌우나 되는 긴 통신글까지 쓸수 있게 되였다.
글을 쓰면서 사회에 대한 견식을 넓혔으며 금싸락같은 지식을 배웠으며 인생의 리치를 깨달았다.
단위에서도 동료들과 함께 전파속에 엮은 미담들을 선전자료로 도맡아싶이 썼고 다른 우수한 사람들을 기사화하면서 나도 그속에서 사상경계를 높이고 반성도 해보게 되였다.
통신원이라면 신문을 열독하고 글을 써야 할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신문을 주문하고 읽게 해야 한다.
나는 통신원의 사명감을 안고 친척, 친구,이웃 및 익숙한 지인들과 단위를 찾아 다니며 《길림신문》을 다채롭게 꾸려 읽을 재미가 있다면서 주문하게끔 설복하였다. 새로 지은 아빠트에 문패번호가 없어 어떤 주문호들이 신문을 주문하지 못하는 실정을 료해한 나는 우편배달원을 찾아 협상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여러날 애쓴 보람으로 1997년도에는《길림신문》 22부 주문할수 있었다. 《길림신문》을 한부라도 더 발행했다는 자호감에 마음이 뿌듯하였다.
교원절을 맞으면서 연길시 건공가 리퇴직교원주택에 우편함이 없어 신문을 주문할수 없는 정황을 헤아려 유관부문에 반영하여 우정국에서는 만여원에 달하는 우편함을 선물로 교원주택에 마련해 주기도했다.
독보는 당장 눈에 확 뜨이는 그 어떤 대가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수확은 부지불식간에 삶의 질과 차원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신문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터득한 덕분에 본직사업에서도 방향이 섰으며 앞장서 노력함으로서 '전주 3.8붉은 기수'녀공신 기준병 ,길림성통신공사 봉사표병으로 되였으며 2003년에는 인민대회당 국가연회에 함가하는 행운을 지니게까지 되였다 .
또한 수차 신문사 우수 통신원으로 표창받았고 동북삼성 우수통신원 표창대회에 참석하는 영광도 지니였다.
《길림신문》이 있었기에 나의 삶은 오색찬란하였으며 삶의 희열도 느낄수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로년에 이르기까지《길림신문》과 함께 성장한 나날들을 영원이 잊을수 없는 추억이며 생각하면 감개무량하다. 《길림신문》은 영원한 나의 스승이다.
《길림신문》이 더욱 풍성한 볼거리와 친절한 내용으로 대중들앞에 다가갈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