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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길림신문] 그해 초겨울은 엄청 추웠다

안상근      발표시간: 2025-10-20 15:22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10월도 막 흘러갈 무렵부터 신문사는 약속이나 한듯이 사무실 내에서도,사무실끼리도 별스레 분주스럽다. 농사군의 일년지계는 흔히 봄에 있다 하지만 신문사의 새해농사 차비는 어김없이 늦은 가을부터 이른 겨울 사이에 낟가리가 대체로 가늠된다. 말하자면 주문부수가 느긋하게 장작처럼 푸짐히 쌓여야 새해 신문농사에서 신바람날수 있다.

벌써 신문사발행 사령탑인 허동철부총편집은 이칸저칸을 다니면서 슬슬 부채질한다. 발행차비를 서두르라는 무언의 주문이다. 모두들 달리던 펜을 놓고 나름대로 이것저것 저울질 한다.

"벌써 발행철이네. 올해는 어데를 뛸가?..."

지금은 금시초문일지 몰라도 그때에는 발행은 편집 다음의 단계성 제2전역이였다. 편집과 발행은 떼놓고 말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수 없는 쌍둥이나 다름 없었다. 그만큼 편집자이자 발행인으로, 생산자이면서도 판매자인 이중 배역을 달갑게 받아들였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느사이 스르르 길들여져 있었다. 딱 상품이라고 찍어 말하기는 거북하더라도 상품의 속성만은 분명 갖고있는 신문이라 많이 발행되고 팔리고 애독하는 독자가 있을 때라야만이 자기 구실이라도 할수 있다는 건 삼척동자라도 어련히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신문사는 자연히 발행에 사활을 걸게 되였고 편집기자들도 발행을 강건너 불보듯이 외면하거자 회피하지 않고 자각적으로, 주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직장문화가 길림신문의 특이한 풍경으로 정착되게 되였다. 물론 발행을 리해하고 받아들이는 정감과 열정은 나름에 따라 온도차이가 있더라도 대부분 직원들은 발행을 기자직업의 한부분으로 리해하고 있었고 이 같은 발행문화는 해마다 움직이는 인원수에는 변화가 있더라도 대략 20세기 말, 21세기 초엽까지 꾸준히 이어졌다고 추정할수 있다. 그만큼 직원 모두가 용광로같이 후끈 달아오른  발행분위기에 녹아들었다고 말해도 이의가 없다. 오늘날까지도 《길림신문》사에 있거나 퇴직했거나 떠난 경력자들이 제일 많이 외우는 단골메뉴가 발행화제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발행은 직업이면서 자존심이였고 모두의 이야기였고 애잔한 추억이였다.

발행철이면 남녀로소 개인의 안위를 제쳐놓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된 맥락도 바로 여기가 있었다. 

1989년도는 신문사가 창간된지 4년째되는 해였고 발행량도 온정속에서 상승그라프를 그어가고 있었다. 사지도부에서는 이 여세를 몰아  발행량과 발행범위를 넓히려고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산재지구에서는 주재기자들이 대들보를 맡으면서도 지역이 하도 넓기에 본사에서 10여명 인원이 가세하여 조선족이 집중되여있는 현과 향진을 집중공략하였는데 이같은 관행이 창간해서부터 쭉 이어지고 있었다. 연변의 경우,  그때까지 연길에 본부가 있었기에 신문을 꾸리면서도 8개 현,시에 담당자를 지정하여 맡았고 연길시는 두부모 베듯 각 가두와 향진을 갈라서 각 편집들이 나누어 발행을 도맡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되였다. 연길시구역 발행을 맡은 직원들만은 대체상 반편집, 반발행일군이였다. 즉 사정에 따라 오전에 발행으로 뛰고 오후에 편집테이블에 마주 안거나 오전에는 편집하고 오후부터 저녁까지 발행으로 뛰는 등 스타일이 각이하였다. 신문도 어김없이 꾸려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출근할 때도 흔히 야전복차림이였다.

그때를 말하자면 당시의 나도 이같은 분위기에 떠밀려 발행을 자청했다고 할수 있었다. 창간초기 산재지구의 통화, 영길 등 곳으로 선배들에 묻어 발행을 다니면서 발행의 비중을 실감했기에 한번 부딪쳐보고 싶었다. 하긴 자기가 꾸리는 신문을 보는 독자가 많을수록 기분날게 아닌가 하는 유치하다할 욕심도 깔려 있었다.

왜서 훈춘으로 가겠다고 했는지는 딱히 말하기 어려우나 아무튼 연변의 8개 현,시에서 훈춘이 유난히 자석처럼 나의 마음을 끌어서였다.

1983년 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일보》사에 입사한 뒤 당시 문상호 선배님을 따라 맨 처음 나선 취재길이 훈춘이였다. 그때까지 훈춘은 미 개방지대였기에 변경통행증을 소지해야 출입이 가능한 신비로운 고장이였다. 도문에서 한번 검사하고 훈춘에서 썩 멀리 떨어진 변경쪽에 위치한 춘화쪽으로 갈때 훈춘뻐스역에서 또 한번의 검사가 있었다. 꽤 까다롭고 번거롭더라도 나이가 어려서인지 미지의 곳으로 간다면 가릴게 없이 흥미로왔다.

그때 춘화림장에서 과거 궁정료리를 본따서  산닭고기, 감자 당면, 야생버섯을 주메뉴로 한데 볶아서 식탁에 올렸다는 음식료리는 내 생에 최고의 음식으로 각인되여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맛이 혀끝을 간지럽힌다. 금상첨화라고 할가, 정직하고 후더운 훈춘의 인정도 따뜻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아무튼 그해 10월말에 훈춘으로 떠났다. 그때는 훈춘을 얽매이던 규제들이 많이 풀려있어 래왕에는 거칠게 거의 없었다. 대신 도로사정은 힘들었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기전이고 모래길이 태반이였다.

나는 옛 훈춘호텔 앞켠 개인 려인숙을 찾아들었다. 장시기 작전을 해야겠는데 호텔을 잡자면 아이보다 배꼽이 큰 격으로 경비사정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막무가내 궁여지책이였다.

려인숙은 아담지고 따뜻한 온돌이였다. 식사는 따로 없었고 하루 숙비 3원으로 기억된다. 가끔 자전거도 빌릴수 있었다. 핸드폰은 모르던 세월이고 전화도 없었다. 물론 전화 네트워크가 활짝 발달하기 전야이다만  전화칠 일도 많지 않았다. 딱 필요할때에는 5분가량이면 달려갈수있는 우전국이 코앞에 있기에 꽉 막힌 것도 아니였다.

이때로부터 종착점은 나름대로 세웠으나 가시덤불로 뒤덮인 나의 '장정'이 시작되였다. '장정'이라 일컬은 건 그날부터 내처 지루하게 걸어 다녔기에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지금도 제일 많이 남는 기억은 걸은 시간들이였다. 물론 헤아릴바 없지만 정말 많이 걸었다. 좀 생색내 바꿔 말하면 뛰여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수 있다. 훈춘시를 중심으로 정변, 영자, 사만자 등 훈춘소재지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마을들과 도문 입구에 있던 량수(그때는 훈춘시에 귀속되여 있었음), 반석향 마천자, 하다문, 반석 호룡 등지를 오르내리 훑으면서 발행 공백지역을 하나하나 메워 나갔다. 주로 훈춘 시가지를 축으로 하여 그 주변의 반경을 넓혀나가는 나름의 그림이였다. 나의 불찰로 그때 기록메모를 잃어버려 지명과 인명의 상당부분을 확인할수 없게 되여 자주 필이 멈추게 되여 무척 아쉬워난다.  또 그사이 행정구역이 많이 변경되면서 어떤 촌과 마을들은 지도에서까지 영영 사라지면서 내 재간으로는 확인할바 없어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래서 당시 훈춘시인민검찰원 공소과 과장을 하면서 나한테 많은 힘이 되여준 박길범 연변대 조문학부 선배님(지금 퇴직후 훈춘시장기협회 회장임)한테 우정 전화로 물어 한참이나 확인하느라고 헤맸으나 석연치 못하여 저으기 불안스럽다.

솔직히 말해 선전부같은 행정분야의 도움을 청하면 지름길도 찾을수 있었겠지만 나는 독불장군으로라도 혼자서 열어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현,향급 선전부문에는 찾아가서 발행 왔다는 인사를 하고 대체적 상황을 료해하면서 식사를 한번 한게 전부이다. 발행 력점은 촌급에 두고 촌급 서기, 촌주임을 만나 이들한테서 또 다들 인맥을 열어 한촌, 한분씩을 알아 나갔다는 것이 이른바 나의 어슬픈 노하우라면 노하우이다. 실개천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더니 무작정 찾은 낯설은 서기, 촌주임들과 차츰 얼굴을 익히고 정감을 쌓아놓게 되면서 마치 문어발식으로 많은 서기, 촌주임들과 격이 없이 사귀게 되였는가 싶다. 물론 '시작이 절반'이라고 무게를 다는 것처럼 힘들기는 누구나 알다싶이 무척 힘들다.

흔히 어느 누구의 소개를 받고 찾아왔다면 2-3부쯤은 쉽게 대답한다. 시원시원해서가 아니라 례의상 소개해준 누군가의 체면쯤은 살려주는 계산이 깔려있다. 또 촌간부들에게는 신문 몇부는 주문할수 있는 지역혜택이 공론화되여 있기에 어쩌면 손바닥 뒤집기거나 식은죽 먹기나 다름없다. 그런데 2-3부를 주문하자고 주먹쥐고 적어도 100세대 촌을 일일이 찾아다닌다는 것은 수지가 안맞는다. 1989년 훈춘시의 발행량은 200여부를 조금 더 벗어난 것으로 기억된다. 점점의 불꽃도 료원의 불길도 타오른다고 하나 그 부수가 어느 천년에 '료원의 불길'로 타오를지 아득하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 품을 들인 곳은 영자촌이였다. 훈춘시가지 서북켠 입구에 있는 마을이였는데 당시 갓 개발중이였다. 개발중이라는 말을 풀이하면 도시확장에 따라 농지징용보상 등이 이뤄 지면서 돈을 가두고 있다는 은어가 깔려있다 해도 크게 틀릴데 없다. 이 마을의 김서기는 30대 중반쯤이였는데 사유가 활발하고 대범해서 20대 후반인 내가 다가가기에도 편했다. 역시 돈이 없다고 우는 소리로 막는게 아니라 돈은 있다고 수월히 털어 놓으면서 시교 구역의 민심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기에 각 촌민소조조장, 부녀조장들을 같이 설득해 주면 길이 열릴거라고 선의적인 가능성까지 열어주었다. 

희망의 불씨를 잡으니 힘든줄 몰랐다. 10여개 촌민소조가 시내외곽 변두리에 널려 있었는데 촌민소조가 서로 엉켜있어 누군가를 찾기부터가 힘들었다. 농촌호구라고 해도 시내생활방식에 길들여 졌기에 낮에는 집이 빌 때가 많았다. 그러면 밤에 찾아다녔다. 나의 근거지가 도심의 려인숙에 있는 특혜를 톡톡히 누릴수 있었다. 대답했다가도 다음에 찾으면 어느 이웃의 선들비를 맞았는지 힌들 돌아 누우면 또 다시 설득에 들어가야 했다. 그때 발행만료기일까지 이 마을을 메주 밟듯 다녔다고 할수 있다. 간부들사이도 생각처럼 원만하지 않을 때가 있기에 이른바 신문 장사를 하면서 관계를 망그리면 게도, 구럭도 놓칠수 있다. 여기에는 높은 지혜가 필요하다. 단 기본적인 처방은 어데나 맞는 한가지 즉 서로의 '말'을 나르지 않고 각자의 우세를 꽉 잡는 것이다. 일일이 말하는 건 적절치 않기에 생략한다마는 그해 12월 28일 주문부수를 보고 쾌재를 불렀다. 전촌 130여세대가 촌에서 공익금보조에 개인자금을 보충하여 100% 주문한 쾌거였다.

흔히들 발행의 천신만고를 헤쳐 나가는데 1등 처방이 술이라고 하나 영자촌의 촌장과 서기와는 술 마신적도 없었다. 그외 정변촌이거나 고산촌 등 촌의 허다한 촌간부들과도 권커니, 작커니로 주문을 이뤄낸게 아니였다. 서로의 신뢰와 설득속에서 이뤄졌다 할수 있었다.

그렇다고 술이라고 전혀 은을 내지 않는 것도 아니였다. 반석진 호룡촌에 갔을 때였다. 촌의 김서기는 역시 호방하고 시원시원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저녁무렵에 촌에 이르니 그날 저녁 김서기네 집에서 촌간부들의 음식자리가 있었다. 기분이 후끈했다.

술이 몇 순배돼서 김서기는 사발에 반나마 남은 배갈을 부어 나에게 권하였다. "기자선생, 이 술을 굽내고 나를 형님이라고 불러주면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신문 100부를 주문하겠다니깐". 이미 40대인 김서기를 형님이라고 불러도 거칠게 없었다. 물론 롱담이였겠으나 큰 고기를 발견한 낚시군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도 약간은 술을 마시는 편이기에 무서울게 없었다. 단숨에 쭉 굽냈다. 목구멍이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김서기가 동생이라고 부르는데도 도정신하면서도 형님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술좌석에서 몇번 형님이라고 불러 달라는데도 기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술이 거나해지자 게임도 못 끝내고 그대로 잠들게 되였다.. 이튿날 아침 깨여나니 머리가 뗑해나면서 귀가 윙윙거렸다.  누워서 엊저녁 일을 돌이키면서 어떻게 첫마디를 떼야 할지를 저울질해 보았다. 취중약속이 취중실언으로 자칫 날려갈수 있어서였다.

밖에서 나무패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 김서기가 밖에 나간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가서 김서기가  손에 든 도끼를 잡으며 말했다.

"형님, 내가 좀 팰게요" 그 말에 김서기는 "어?" 하고 흠칫하더니 인차 도끼를 넘겨주었다.

"응, 그래, 그럼 동생이 좀 패보아라..."

대화는 약간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둘사이 거리는 확 졻아졌다. 이어 아침상에서 해정술을 마시면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 오늘 기분이 좋다. 동생을 만났으니 신문 100부 주문하겠다. 며칠 뒤  외국에 장사로 보름가량 나가 있겠으니 좀 기다려줘, 돌아 올 때면 마을에서 쌀을 다 판 뒤일테니 그때 한꺼번에 주문할게,걱정마..." 이렇게 취중속에서 시동이 걸린 100부 게임은 머리가 맑아지는 해장술속에서 전반부를 '이기게'되였다.

갑작스레 이뤄진 일이 탈릴 때가 많다더니 년말 무렵에 김서기를 찾아가니 국외장사로 나간채 여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목구멍에 걸린거나 다름없는 맛갈스러울 이 고기를 쉽사리 포기할수 없었다. 그래서 우전국에 나가서 자주 전화를 걸었는데 보름이 푼히 지나가서야 김서기 안해가 래일 온다고 기별을 전해왔다. 발행 만료일도 아슬아슬했기에 나는 이튿날 일찌감치 호룡에 찾아가서 김서기가 앉아 온다는 뻐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후 세시무렵에야 김서기가 탄 뻐스가 도착했다. 김서기가 뻐스에서 내리자마자 "형님 왜 인제야 오우?" 하면서 손을 잡고 조급해하니 김서기는 나를 사람좋게 위안했다.

"장사가 잘 안되여 허둥지하다보니 동생 신문주문마저 까먹었구나, 시름놓게,  내 인차 주문할게..."

호룡에서의 게임 후반부는  공익금 일부 보조, 일부 농민개인부담으로 부녀조장들이 다그쳤으나 시간이 모자라서 100부는 주문 못하고 83부에 이른 아쉬움을 남긴채 접고 말았다. 대신 나에게는 외로운 형님이 생기게 되였다. 내가 떠날 때 인자한 형수님은 집에서 지은 입쌀이니 맛보라면서 기어이 보내주었다.

김서기가 꼭 술게임으로 신문주문을 했다고 보면 오산이자 곡해이다. 그만큼 세상을 보는 식견이 있었고 신문을 아꼈기에 가능했다. 사업중에 공적 일로 사적 인연이 맺어지면 금상첨화같이 가배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

주요한 교통도구가 두 다리였다고 말했다만  걷는 우세는 분명 따로 있었다. 촌마을과 촌간부들을 참빗질하듯이 찾자면 걸어다니는게 무엇보다 홀가분하다.

코바람에 서리가 매달리는 아침 일찍 려관을 떠나 서쪽켠 언덕을 따라 정변마을에서 떠나 하다문 뒤언덕까지 내처 훑으면서 걸어 내려가면 어느새 땅거미가 깃든다. 되돌아올 때는 시간이 아까와도 약속이 없으면 되도록 식사무렵이기에 찾지 않고  도로를 따라 '귀가'길을 다그친다. 워낙 해가 짧은 이른 겨울이여서 훈춘시구역에 들어서면 온통 캄캄해진다. 그리고 어느 간이음식점에 들어가서 대충 저녁이라고 에때우고 막 려관의 따뜻한 구들의 이불속에 파고 들어가면 하루 40킬로메터 장거리를 걸으면서 쌓인 피곤도 스르르 사라져 버린다.

마치 이삭 떨구고, 김매고, 수확하는 농사일처럼 나의 이 80킬로메터 도보작전도 세번 이루어진 같다. 처음에 약속을 받고 다음 길에 주문 여부를 체크해보거나 미진하면 독촉하고 마지막길에 확인절차까지 받는게 마치도 농사일의 판박이다.

눈길을 걸어 저녁에 돌아올 때는 해빛에 녹은 눈에 신이 떵떵 얼어서 다리가 시리고 뻣뻣해나서 이가 덜덜 쫓기면서도 뿌린대로 거둔다고 뛰는 만큼 보람이 있었기에 신바람나고 힘든줄 몰랐다.그러면서도 나의 사정을 헤아려주는 훈춘구독자들의 마음이 지극히 고마왔다.그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났다. 

12월 28일 발행을 접고 마지막에 우전국에 가서 확인해보니 훈춘 발행량이 무려 1310여부였다. 고진감래라 할가? 그 전해200여부에 비하면 놀라운 비약이였다. 정말 기뻤다. 사무치게 기뻤다. 공들이면 탑이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2만부라는 발행고지를 향해 주먹 불끈 쥐고 망망한 바다를 달리던 우리 신문사의 선박군들 속에서 나는 한낱 일엽편주에 그칠뿐이였다.

두달만에 직장에 찾아 들어가니 모두들 파격적 수자라면서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그속에서 판공실주임이 조용히 나를 불러냈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집(직장)에서 걱정을 덜어주지 못해 미안하네. 제때에 석탄을 실어갔더라면 애 엄마가 애까지 업고 직장까지 찾아오지는 않았겠는데…”하고 미안쩍게 얼굴을 붉히였다. 사무실 주임이 사과같이 한 말이 나에게는 되려 폭탄처럼 머리를 두드렸다.

“우리 집에서 직장을 찾아왔단 말입니까?”

“석탄을 제때에 실어다주지 못해서 답답해서 왔더구만.”

순간 뒤잔등이 서늘해났다. 나는 안해가 직장으로 찾아오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대남자주의여서도 아니다. 나도 안해 직장에 전혀 가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넘지 말아야 할 공과 사의 보이지 않는 적정선이 있어서이다. 두달 남짓한 핫바지고역이 안해의 무단 직장출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이 된 것 같아서 참기 어려웠다. 저녁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안해와 아이가 반가워하든 말든 호되게 닦아세웠다. 안해는 대꾸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들먹이며 서럽게 울었다. 맞대꾸라도 해야 전의가 불탈 텐데 묵묵히 울기만 하니 결국 내가 머쓱하게 물앉게 되였다. 이것은 내가 딱 한번 안해를 울린 유래이다. 며칠 후에야 안해는 저녁을 먹을 때 나를 슬쩍 건드렸다.

“천정이 떠나갈 듯이 화를 푸니 속이 풀리나요?”

“여직껏 내가 동무네 직장을 안 찾아가는 걸 알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화룡 복동탄광에서 우리 직장에 실어다준다던 석탄이 온다온다 하면서 오지 않아 안해는 일주일 나마 자기 직장 보이라실에서 석탄을 자전거 뒤자석에 야금야금 실어다 때다가 너무 힘들어 막무가내로 우리 직장을 찾아갔던 것이다. 터놓고 말하면 석탄도 마련해놓지 못하고 두달이나 밖에서 나 몰라라 설친 나의 과실이 큰데 안해가 직장을 찾아 갔다는 리유 하나 만으로 성깔을 부린 내가 지나쳤다고 할 수 있었다. 20대 후반의 어리석음이라 할가, 유치함이라 할가... 지금은 웃음으로 넘길 수 있어도 그런 가슴 시린 에피소드가 있었다.

내가 썩 대공무사했거나 정직했다기보다 그 당시에는 옹근 사회에 그런 풍토가 자리잡고 있었다. 모두에게 공과 사를 가리고 버무리지 않거나 자기일로 직장을 괴롭히지 않으려는 그런 자각과 의식이 있었기에 강력한 힘을 구워낼수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천군만마속의 일원으로 그속에 편승했을 뿐이다. 우연하게 훈춘발행을 쓰게 되니 그 기왕지사를 끄집어 나온거지 역시 발행을 뛴 우리 신문사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이같은 말못할 시련이 있었을게 분명하다.

훈춘발행에서 맺어진  소중한 인연을 딛고 새로운 인연의 릴레이도 꾸준히 이어졌다. 단연 훈춘시 영안진 영안촌을 짚을수 있다. 훈춘 발행시 나는 영안촌을 미처 가보지 못했다. 그뒤 연변분사가 신문사자체의 특성을 살려 연변에서 '길림신문 마을'을 육성하면서 영안진 영안촌도 시야에 들어오게 되였다. 사지도부와 동료들의 협력, 그리고 영안촌 김학봉서기와 지도층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길림신문》은 이 촌에서만 300여부를 주문했다. 어느해에는 360여부를 올린적도 있다. 당연히 고 리금남사장이 애초부터 정력을 몰부은 룡정시 조양천진 조양촌과 발행에서 300부 쌍벽을 이루게 되였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또 있다. 하다문향에 갔을 때 우리 신문에 짤막한 기사를 써 보내던 현준걸 친구가 떠올라 그가 근무하던 하산소학교를 찾아 20킬로메터 산길을 걸어 찾아갔다. 대방이 기뻐한건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는 기사도 여러편 쓴외에 교사라는 우세로 나의 발행을 두팔 걷고 도와나섰다. 그는 나중에 민영교사를 거쳐 량수진의 사법간부로 성장되였다. 2021년도인가 그가 퇴직을 앞두고 사업년한을 계산하는데 그때 《길림신문》에 실린 기사의 발표기일을 찾으면 관련부문에서 앞으로 당길수 있는 의거로 삼을수 있다면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래서 당시 홍옥기자한테 말해서 그 기사를 찾아서 알려주었는데 사업년한을 인정 받았다면서 그처럼 기뻐하였다. 《길림신문》이 시골의 한 잔디의 인생반경을 확 넓혀준 일화이다. 현준걸씨는 1989년 발행때에 만나서 알게 되고 만난적이 두번 뿐인데도 오늘까지 친분을 이어오는 친구이다. 얼마전에도 퇴직하면서 고마워 우정 찾아오겠다는걸 기어이 사절하였다. 발행이 이어준 또다른 인연이다.

첫 훈춘발행길이고 시간에 쫓겨 훈춘의 '어미지향'이라고 하는 경신 그리고 양포, 마적달, 춘화 등 곳에는 발행으로는 닿지 못해 못내 아쉽다. 그 뒤 다시 훈춘 발행길에 오르지 못한 여한은 오늘까지 남아있다.

어느덧 35년 나마 훌쩍 흘러가버린 1989년 초겨울의 훈춘 발행길, 유난히 추웠음에도 후더운 훈춘인심이 지켜주어 추운줄 몰랐다... 

 /리원철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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