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吉林朝鲜文报-吉林省委朝鲜文机关报
● 国内统一刊号: CN22-0030 邮发代号: 11-13
길림신문 > 기획

[나와 길림신문] 일본특파원으로 열심히 뛰여다니던 나날들

안상근      발표시간: 2025-10-15 13:55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길림신문》일본특파원을 맡았던 재일조선족 리홍매

2016년 6월, 일본에서 18년간 살고있었던 나에게 메일 한통이 날아왔다. 

-홍매 잘 있소? 오랜만이요. 해외에서 사는 조선족들이 사는 모습을 《길림신문》을 통해 보여주자면 홍매같은 사람이 필요하오. 잘 검토해주오. 

당시 재직에 계시던 《길림신문》사 홍길남사장이 보낸 메일이였다. 

홍길남 사장은 90년대 내가 연변텔레비죤 방송국에서 근무했던 시절의 상사이다. 그 당시 신문보도의 일선에서 맹활약했었고 나에게 신문보도의 기본과 기자의 자세를 가르쳐준 선배기자이기도 하다. 그런 분과 그렇게 거의 20년만에 메일로 련결이 된 것이였다.

1996년에 일본에 오면서 기자의 신분을 내려 놓은 지 한참 된 나는 전혀 다른 생활환경과 생소한 언어환경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모지름을 겪었다. 그나마 그 때는 이국타향의 생활에 점점 안착이 되여가고 있을 무렵이였다. 게다가 내가 사는 지역의 지역신문사 지면 편집실에서 일하면서 일선에서 뛰는 기자들을 엄청 부러워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특파원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기사를 쓰는 일은 신속성과 정확성을 기하는 일임과 동시에 구석구석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정직한 눈과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외에도 사명감까지 가져야 하는 중요한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려감, 아니 겁부터 들었다. 

하지만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에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걷잡지 못했다. 18년만에 나를 찾아 온 ‘기자’라는 이름이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의 옛 감각을 되찾는데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는 근거없는 자신감과, 오랜만에 찾아 온 그 기회를 놓치면 안될 것같은 절박감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불안하지만 한번 해보겠다”는 회답을 보낸 그날부터 나는 움직였던 같다. 마치도 오래 전에 계획된 일처럼, 이미 준비된 사람처럼 《길림신문》일본특파원의 신분으로 섭외를 시작했고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처음으로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学) 경제학부 교수실 문을 노크했을 때, 나는 정확한 기사를 쓰려는 일념만 가졌을뿐 내가 쓴 기사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미처 상상도 못했다. 

2016년 7월 26일, 일본조선족연구학회 회장이였던 니혼대학 경제학부 정형규교수를 취재한 기사 <재일조선족들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가 《길림신문》에 발표된 직후 고향의 독자들이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해왔다. 

-일본에 조선족연구학회가 있다구?

일본에서 사는 조선족에 대한 료해가 깊지 못했던 시기였던지라 독자들은 물론, 편집선생님도 놀라워 했다. 조선족연구학회 회장에 대한 취재인만큼 정체성과 현실 상황에 대한 재일조선족의 고민, 미래에 대한 분석이 구체적이여서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고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이어 보름 후인 8월 13일, <일본 도꾜에서 펼쳐진 민족단합의 대축제>라는 제목으로 재일조선족운동회 기사가 현장보도 형식으로 발표되였다. 기사는 발표되자마자 인터넷으로 널리 퍼졌다. 가장 인상적인 독자 반응이 “일본에 가서 외롭게 사는가 걱정했더니 모여서 운동회도 하네”였다.

그 후 반년간 나는 <연변대학에서 공부하는 일본류학생, 그는 누구?>, <실천을 결합한 재일조선족어린이들 농활체험장을 찾아>,<재일조선족의 새로운 도전과 전환점이 보인다>, <도꾜 한복판에 울려퍼진 '연변팀 쨔유!'>,<몸은 일본에 있어도 고향수재지역 향한 마음 뜨거워> 등 18편의 기사를 발표했다. 평균 한달에 세편을 쓴 셈이다.

일본에서 발로 뛰면서 열심히 취재현장을 누빈 리홍매특파원

고향의 신문을 제때에 접할 수 있다는 현실감과, 잘 살고 있는 모습을 고향에 전하게 되였다는 안도감에 일본의 조선족 사회가 울렁이기 시작했다. 《길림신문》은 고향을 향한 메시지와 어떻게 해서든 고향과의 련결고리를 놓지 않으려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알리는 창구였다. 자식과 형제들이 이국 타향에서 꿋꿋이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되여 한시름을 놓았다는 국내 독자들과,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여러 커뮤니티의 존재를 알게 되여 고맙다는, 오랜만에 조선족 사회의 조직적인 행사에 참여하게 되여 마음이 든든하다는, 신문기사에 실린 사진 덕분에 그동안 끊겼던 인연을 다시 찾게 되여 고맙다는 일본내 조선족들의 메시지들이 끝임없이 나한테 날아왔다. 

돌이켜보면 그 때 나는 무엇에 홀리운 듯, 마치 오직 신문기사를 쓰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뛰여다니며 취재를 했고 밤늦게까지 원고를 썼다. 마인드만은 전업기자급이였을가. 오직 우리가 사는 모습을, 우리 속의 훌륭한 인물을 신속하게 고향에 알려야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나를 해석했다.

“언제 부터인가, 여태 별로 보이지 않던, 키가 그닥 크지 않은 중년녀자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일본에 있는 조선족에 대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더라. 얼나 지나지 않아 각종 행사장마다에서 그녀를 보게 되였는데 번마다 누군가를 붙들고 열심히 취재를 하는 것 같더라. 이튿날이면 그 녀자가 쓴 기사가 여기저기 위챗그룹에 옮겨지면서 일본에 있는 조선족들 속에서 화제가 되군 했다…”였다.

2016년 10월, 일본 조선족연구학회를 취재하는 과정에 나는 일본 와세다대학 명예교수이며 저명한 조선문학 연구학자와 중국문학 연구학자인 오오무라 마스오선생님과 만나게 되였다. 그후 나는 선생님께 여러번 메일로 취재부탁을 드렸고 어렵게 취재허락을 받았다. 내가 거의 석달간 매주 금요일 오후마다 선생님 저택의 초인종을 누를 수 있은 것은 《길림신문》이라는 이름을 걸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였다.  

2017년 3월, <오오무라 마스오의 이국 력사와 문학에 대한 애착>이라는 제목으로 다섯번에 나누어 계렬기사를 발표한 덕분에 그 후 긴 시간동안 나는 오오무라 교수님 내외분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되였다.

비록 늦게 시작된 두 분과의 인연이였지만 계절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러 행사때마다 함께 여러곳을 찾았으며 가까운 곳에서 학문에 대한 교수님의 의욕과 열정을 오래동안 우러를 수 있었다. 생전에 교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나는 선생님이 우리곁을 떠나시는 마지막 날도 가족외의 유일한 사람으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 깊고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에 《길림신문》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잊을 수 없다.

2016년부터 6년간, 나는 수많은 우수한 조선족 인물들을 만났고 조선족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커뮤니티를 찾았다. 특히 2017년 7월, 중국정부와 일본정부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일본의 갑급 건축 설계원 주식회사 JPM의 허영수 회장과 어렵게 만나 취재를 하게 되였다. 그 과정에 나는 허회장이 인솔하는 건축설계팀이 하북 웅안신구 도시설계 현장 답사팀에 뽑혔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접하게 되였다. 나는 그 소식을 속보로 전해 조선족의 자부심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었던 행운의 기자였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길림신문》이 나에게 내여준 귀중한 그 자리 덕분에 나는 6년간이라는 짧은 시간내에 100여편의 행사기사와 30편의 인물기사를 발표하게 되였다. 그 과정에 만나게 된 귀중한 인연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길림신문》이 나에게 맺어준 인연 중 연변지사 김성걸 지사장과 안상근 주임과의 인연 역시 잊을 수 없다.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밤이든 낮이든 나의 시간에 맞추어 세 사람이 끊임없이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것이 내가 6년간 특파원을 이어갈 수 있었던 큰 동력이였던 것 같다.

<해외조선족>코너에서 인물기사, 커뮤니티 기사를 발표하는 과정에 안상근 주임이 글에 대한 나의 의욕을 보아냈던 모양이다. <일본인상기>를 쓰면 어떠냐는 제의를 해왔다. 그 한마디가 그 때의 나에게는 튀는 불꽃이였다고 해야 할가. 부풀었던 열정에 불이 달리고 만 것이다. 

나는 인물기사와 행사기사 외에 <일본인상기> 30편과 <일본인의 연변추억>16편을 련재했다. 뜻깊은 작업이였다. 기사와는 또 다른 독자반응들이 나의 마음을 부풀렸고 그동안 깊은 곳에 잠재워 두었던 오래된 꿈을 주저없이 꺼낼 수 있게 등을 떠밀어 주었다. 

갑자기 닥쳐온 코로나로 세상의 흐름이 정지되고 아주 당연했던 일상조차 잃었던 시기, 끊임없던 취재요청이 줄어들다가 드디여 없어졌고 나는 《길림신문》특파원의 자리를 내려 놓았다. 

세상은 멈췄어도 지난 추억과 시간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2022년에 나는 《길림신문》에 발표했던 130여편의 기사 중에서 대표적인 기사를 뽑아 작품집 《일본에서 살기》를 출판했다. 책이 출판되는 날 느낀 수많은 감수 중 《길림신문》에 대한 애정이 제일 컸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길림신문》이 창간 4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에 나와 《길림신문》을 돌이켜 볼 수 있어서 더없이 영광스럽다. 이국 타향의 소식을 제때에 신속하게 발표해주기 위해 밤을 새울때가 많았던 여러 편집선생님들과, 나를 찾아 꺼내주신 홍길남 사장님께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바이다.

/리홍매 


编辑:안상근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