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최 훈
1953년생인 내가 벌써 일흔고개를 넘었다니 나 절로도 믿기지 않는다.허나 늙으면 추억속에서 산다더니 앉으나 서나 지나간 옛 일만 머리속에서 뱅뱅 맴돌아치니 이게 바로 늙었다는 표현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해 11월초, 퇴직후 근 10여년을 하루와 같이 애지중지 아끼고 사랑해온 북경조선족 락원예술단 성립 10주년 경축행사에서 내가 작곡한 예술단의 단가와 여러수의 노래들을 목청껏 부르는 회원들을 바라 보노라니 격동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면서 저으기 잊지 못할 55년전의 음악 계몽 선생님과 소몰이가 떠올라 서투른 글 솜씨이지만 적어보았다.
연변 안도의 편벽한 시골 태생인 내가 1969년 가을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에 내려 왔을 때는 키도 작고 몸도 너무 말라 “저런 애가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어...”라는 비웃음도 들었다. 역정도 났지만 4형제 중 맏이이고 또한 서발막대 휘둘러도 거칠것 하나 없는 가난한 우리 집 사정때문에 꾹 참고 일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생산대 대장이“생산대에 소 열댓마리 있는데 약삭바르고 착한 네가 그 놈들을 방목하면 안 되겠냐?”하고 묻는 것이였다. "방목? 네! 좋습니다. 얼씨구!..." 어쩌면 대장이 나의 마음을 이다지도 잘 헤아려 주는지! 그렇지 않아도 아줌마들과 함께 논밭에서 일하는 것이 딱 질색이였는데~ 소를 몰고 시원히 산으로 마음껏 다닌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입이 귀에 걸렸다.
이튿날부터 매일 아침 소를 몰고 깊은 산골로 들어 가는 심정은 기쁘기만 했다. 그런데 소들이 풀을 뜯어 먹는 시간에 할일 없이 빈둥대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처럼 핸드폰이나 있으면 게임이나 놀겠는데, 어떡하지! 한참 궁리끝에 갑자기 노래 부르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떠 올랐다. 음악에 남다른 흥취가 있는 나는 소학교때 음악 시간을 좋아해서 선생님 발풍금에 맞추어 노래도 빨리 배우고 잘 부른다는 칭찬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더는 그런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산속에서 방목하니 그 생각이 떠 올라 저도 몰래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낮은 소리로 부르다가 점점 마치 누가 시키는 것처럼 목청을 있는대로 다 높여가며 알고있는 노래를 하나하나 다 불렀다. 진짜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쓰레기 무지에서 그닥 낡지 않은 하모니카 하나를 발견하였다. 하모니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격이였다. 남들이 볼가봐 얼른 호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와 깨끗이 씻고 불어 봤더니 소리도 제법 괜찮았다. 또 닭알 몇 알을 들고 합작사에 가서 팔아 값이 제일 싼 피리 하나까지 더 샀다.
" 와--이 두가지 악기면 됐어! 되고 말고!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인데 이런 악기까지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 혼자 주먹을 불끈 쥐고 당금 뭔가를 해낼 잡도리였다.
이튿날 산에 도착하여 소를 풀어 놓고는 몸에 지니고 온 하모니카와 피리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기쁘기도 하고 제대로 불수 있을지 자신감도 없었다. 그러나 '흥취는 선생'이라는 말처럼 혼자서라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입가에 피리를 갖다댔다. 처음엔 삑삑 서투른 소리만 나왔지만 결심하고 계속 불었다.
'무엇이나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 진다'고 내가 그렇듯 불고 또 불고 싶어했던 피리와 하모니카니 나 절로도 불면 불수록 점점 괜찮아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야, 나도 할수 있구나! 하면 되는구나! " 너무 재미있어서 점심 먹는 것도 다 잊고 련속 작전을 이어갔다. 거기에다 깊은 산속에 유독 혼자이니 곁에 잔소리하는 사람도, 눈치 볼 사람도 없이 내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는 것이 너무 좋아 어깨춤이 절로 났다. 나의 피리 연습은 날마다 더 기세가 높아졌다.
사람의 구지욕이란 따로 있는가 본다. 내가 이렇게 실컷 노래도 부르고 피리도 불면서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차츰 더 한층 높은 단계인 도는 어떤 소리가 나고 레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 하는 음악리론에 신경이 쓰여졌다. 하여 중학교 다닐때 책가방을 도로 챙겨 피리, 하모니카 그 외에 볼펜과 기록할수 있는 공책까지 갖추어 소몰이 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음악학교에 다니는 듯한 기분으로 하루하루 더 신났다.
그렇게 들떠있고 빠져있다가 하루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내가 정신없이 피리를 불고 볼펜으로 여러가지 기록하는 사이 소 무리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아뿔사, 이걸 어떡하지? 피리고 뭐고 다 팽겨치고 나무 숲속을 헤치며 찾아 보았지만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 어쩌면 좋아!? 눈앞이 다 캄캄해 나며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얼마나 서럽고 무서웠던지 눈에서 눈물이 다 핑그르르 돌았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눈물을 닦으며 어망결에 산 길 땅 바닥을 내려다 보았는데 선명하게 찍힌 소 발자국이 보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나는 조심스레 그 발자국 방향을 따라 깊은 골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늘을 찌르는 키 큰 나무가 우거진 골안에서 혼자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였겠냐만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고 미처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속이 한줌만해져 빌고 또 빌었다.“제발, 제발 소 들아 내 앞에 나타나 다오!”조바심을 안고 한참 올라가노라니 탁 트인 넓고 푸른 초원마냥 록음방초 우거진 풀밭이 안겨 왔다. 아니나 다를까 앞 산등성이에서 소들이 풍성한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둘,셋…열 다섯! " 마치 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목청을 돋구어 소리 높여 세여보았다. 다행히 한마리도 차나지 않고 다 찾았다. 나는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인츰 달려가 연신 제일 어린 송아지 등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음매, 음매” 송아지도 주인을 보고 반갑다는듯이 머리를 쳐들며 화답을 한다. 이번의 교훈을 통해 소 몰이에 대한 책임감을 한층 더 높였고 소방목도 잘하면서 음악 공부 자습도 꾸준히 견지했다.
석달간의 방목 기간에 나는 도레미 음색의 소리 모양과 거기에 따르는 음이 어떤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해 기본상 장악하게 되였다. 물론 후에 나의 끈질긴 노력도 첨부되였지만 그때 방목하며 기초를 닦은 그 노력을 바탕으로 1975년 연변예술학교 사자반(师资班) 시험에 합격할수 있었다. 졸업후에는 화룡현 로과중학교 음악교원으로 배치받았다. 평생 내가 하고 싶던 악기를 마음대로 다루며 40여년 교직에서 작곡, 편곡, 지휘까지 할수 있는 재능을 키웠다….
티없이 순결하고 시내물처럼 맑았던 55년전 소몰이 하며 불던 정겨운 피리 소리, 고군분투 내 음악 생애의 첫 스타트로 영원한 초불이 되여 나의 인생길을 밝혀 주었다. 술덤벙 물덤벙 철모르던 나를 소방목의 길로 알선해준 이미 작고하신 생산대장님이 너무 보고싶다. 두손 모아 명복을 빈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인생의 후반전 역시 자기 격에 맞는 일들을 적극 찾아하며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걸맞는 현명한 로인으로 생활해가리라 다짐하게 된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