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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에 죽을 각오로 결사대로 나갔다”

리전      발표시간: 2024-10-21 10:44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로병사의 이야기](3)

“22살에 죽을 각오로 결사대로 나갔다”

―제대후 ‘연길시민’ 된 항미원조 중기관총수 로도현 만나보다


“반장이 작전임무를 선포하고 전사들이 돌격대로 나가면서 청원서를 쓰던 정경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너도나도 이름과 고향, 고향집에 있는 련락 가능한 가족 이름을 본인이 입고있는 옷에 쓰면서 마음속으로는 이미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돼있었다.”

92세 고령의 항미원조 참전용사 로도현

기자의 인터뷰에서 70여년전 전쟁터에서 결사대로 나가던 장면을 회억하는 92세 고령의 항미원조 참전용사 로도현(劳道贤)의 표준어에는 광동성 억양이 섞여 있다.

희생할 각오로 결사대에 나서다

1932년 9월, 3남1녀중 셋째로 태여난 로도현(한족)은 1949년말 고향 광동성 령산현(현재의 광서쫭족자치구 흠주시에 귀속)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이듬해, 18세의 젊은 로도현은 국가의 호소에 적극 호응해 입대했다. 이렇게 중국인민해방군 보병이 된 그는 북상하여 항미원조에 참여하게 될 줄을, 약간년 후 ‘연길시민’으로 한평생을 살아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젊은 시절의 로도현

1952년 항미원조전쟁이 지속되면서 로도현이 소속된 부대는 조선 전장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루 저녁은 퇀정치부 주임이 ‘항미원조, 보가위국, 우리 함께 애국주의, 국제주의 정신을 발양해 영웅의 국제 전장으로 나아가서 세계 평화를 수호합시다!’라면서 동원연설을 하는데 나와 전우들은 국가의 안녕을 수호할 중임을 떠메야 한다는 굳센 책임감으로 벅차올랐다.”라고 로도현은 회억한다. 

로도현과 전우들은 기차로 료녕성 안동(현재의 단동)시에 도착해 잠시 머물고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신의주에 도착한 뒤 서해안으로 이동, 1952년 경에 개성 동북쪽에 이르러 163.3고지에 주둔하게 되였다. 고지 산기슭은 아군이 운송과 보급을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경지로서 고지를 지켜내면 지원군이 적군을 한강 이남으로 몰아내는 데 최대한도의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중대는 이곳에서 무명고지를 지키고 있는 적들과 대치 상태에 있었다. 공중화력과 지상 부대가 배합된 적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포격으로 아군의 수송 통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로도현의 부대는 적의 감시를 뚫기 위해 반격을 결심했다.

“적들은 우리 군의 움직임이 보이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총과 포를 쏘아댔는데 밤에도 신호탄을 쏴서 그 불빛에 목표물이 보이면 대폭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우리 부대가 필요한 물자를 운반하고 병력이 이동하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에게 아주 불리했다. 연구 끝에 적들의 무명고지를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 부대의 작전포치에 따라 련장이 작전임무를 선포하고 대원들이 앞다투어 전투청원서를 쓰게 되였다고 말하는 로도현의 두 눈에는 견정한 빛이 어려있었다.

젊은이들 못지 않은 격양된 목소리로 혁명가요를 부르고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로전사 로도현(왼쪽 사람) 

너도나도 청원하는 통에 련에서는 최종적으로 작전능력이 가장 강한 전사들만 선발하여 작전소조를 무었다. 그중에는 화력조, 폭파조, 엄호조도 있었다. 키가 작아 적군에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 우세로 로도현은 폭파조에 배치되였다. 폭파조는 전사들마다 낮에 이미 익히 살핀, 적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지형에 따라 수류탄 2개를 몸에 둘러맨채 어둠을 타고 전진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폭파조 세명 전사는 철조망을 끊고 적의 또치카 앞으로 돌진하여 수류탄을 투척해 또치카를 성공적으로 폭파시켰다. 이어 그들은 돌격총을 들고 또치카 안으로 뛰여들어가 큰소리로 웨쳤다. 

“중국인민지원군이다! 꼼짝 말앗! We are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don’t move!”

이번 전투에서 그들은 적군 8명을 사살하고 흑인과 백인을 포함한 3명 미군을 생포했으며 돌격총 등 무기를 로획했다.

적의 불발탄 주어다가 ‘지하 장성’ 쌓다

조선전쟁에서 지원군의 용맹하고 완강한 혁명주의 정신과 날렵하고 령활한 전략전술 외에도 갱도가 중요한 방어시설로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

갱도전은 중국인민지원군이 항미원조전쟁기간에 사용한 작전방법이다. 1951년부터 시작된 전역 대치단계의 산지방어작전에서 적들이 절대적인 화력 우세로 낮에 지상진지를 점령하면 지원군은 밤에 갱도를 리용해 반격하여 적을 섬멸하고 지상진지를 빼앗아왔다. 적군의 맹렬한 포화속에서 지원군은 ‘마치 땅속에서 솟아나오듯’ 깜쪽같이 나타나서 적들을 물리쳤다.

1952년, 개성 동북쪽에 이르러 163.3고지에 주둔하자 로도현은 전우들과 함께 주동적으로 갱도를 팠다. 조선의 산은 대부분이 돌산으로 단단한데다가 야간에는 작전을 해야 했기에 갱도굴착작업은 낮에만 진행할 수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갱도에서 전사들은 쇠망치로 돌을 조금씩 파낸 뒤 폭파약으로 폭파해 길을 뚫었다. 환풍기가 없이 갱도에서 몇 달씩 작업을 하다보니 목에서는 시커먼 가래가 나왔다.

기자의 취재를 받고 있는 로도현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폭발물이 부족한 것이였다. 방어전선의 효과적인 확장을 위해 적들의 불발탄(哑炮)의 화약을 리용하자는 로도현의 제안은 부대 지도자의 비준을 얻었다. 로도현은 봉쇄지역에서 되돌아가 불발탄을 하나둘 메고 왔다. 200미리메터 직경의 포탄들은 무게는 100근이 넘었다. 포화가 빛발치는 진지에서 로도현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총탄알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요리조리 날렵하게 피하여 매일 포탄을 주어왔다.

“낮이라 적들은 폭격기로도 포탄을 투하하고 포도 쏘고 기관총도 쐈다. 비결이 따로 없었다. 날렵하게 움직여 적의 포화를 뚫고 포탄을 주어와야 했다. 포탄을 주어오면 또 분해하여 폭파약으로 썼다.” 로도현은 그때 오로지 포탄을 가져와야 한다는 일념으로 두려움을 잊은채 포연속에서 좌충우돌해야만 했다.

로도현과 전우들은 신속히 폭파약으로 갱도굴착작업을 이어가 견고한 방어공사를 구축했고 163.3고지의 갱도 방어체계는 점차 완벽해졌다. 갱도는 효과적으로 적들의 비행기와 대포의 빈번한 폭격을 막아냈고 전우들에게 안전한 은페장소를 제공했다. 적군이 포격하면 지원군 전사들은 신속히 갱도에 숨어들었고 적군 보병이 접근해오면 바로 갱도에서 뛰쳐나와 적을 무찔렀다. 이런 갱도공사와 전술의 결합은 점차 미군의 무기와 장비 우세를 초토화시켜버렸다. 

로도현 등 지원군 보병들이 대규모적으로 갱도공사를 구축하고 갱도작전을 진행한 것은 방어작전에서 진지를 지키는 데 유리했고 진지 진공작전에도 효과적이였다.

‘로병사의 집’행사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로도현

데이터에 따르면 정전협정 체결될 때까지 중국인민지원군은 1,250여키로메터의 크고작은 갱도를 구축했고 6,250키로메터의 참호(堑壕)와 교통호(交通壕)를 파면서 도합 6,000만립방메터의 흙과 돌을 파냈다. 만약 횡단 1평방메터로 넓게 늘어놓으면 지구를 1.5바퀴를 돌 수 있는바이는 인류전쟁사의 또 하나의 기적이다. 우리 군은 38선 진지 종심 10키로메터 범위 내에서 갱도를 주축으로 하고 각종 야전 참호를 결합하여 전투와 방어, 기동과 생활이 가능한 거점식 방어체계를 형성하였다.

중기관총수 로도현은 항미원조 전장에서 3등공을 세웠을뿐더러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귀국후 로도현은 선후하여 산동성 유방시에 위치한 해방군 총후군부 제1예비학교와 산서성 대동시에 있는 해방군 자동차뜨락또르관리학교에 파견되여 지식을 전수받았다. 졸업후에는 133사가 있는 연길시에 돌아와 계속하여 복역하였는데 이젠 그가 ‘연길사람’이 된지도 60여년이 족히 된다. 1963년 제대 후, 석탄건설석유회사에 배치받았다가 1977년 연길담배공장으로 전근, 그 사이 그는 여러 차례 각급 우수당원 등 영예를 따내고 1989년 정년퇴직했다. 

“오늘의 행복은 수많은 전우들의 피 흘리며 목숨 바쳐 바꾸어온 것입니다. 이를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힘이 닿는대로 후대들에게 혁명이야기를 들려주고 혁명정신을 전하고 싶습니다.” 로도현은 현재 연길 ‘로병사의 집’ 의무강연단 성원으로 의무강연 행사 때마다 딸의 부축을 받으며 ‘로병사의 집’을 찾아 기타 로병사들과 합류하며 수많은 후대들에게 혁명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현재 로도현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길 주둔 모 부대에서 직업군인의 길을 걷고 있다. 

연길 ‘로병사의 집’에서 진학가두 청년간부 렴결교양 실천 활동에 참가한 젊은 간부들과 함께

로도현은 수많은 참전용사들과 어깨겯고 불타는 청춘과 뜨거운 피로 눈물겨운 력사를 엮어냄으로써 후대들에게 귀중한 정신적 재부를 남겼다.

취재를 마치면서 로도현은 “오늘의 평화와 행복을 소중히 여기면서 당의 령도 아래 국가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고 나라를 더욱 부강하고 아름답게 건설하기 위해 공부를 잘하고 유용한 인재로 자라날 것”을 평화로운 조국에서 자라나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길림신문 유경봉, 리전 기자

编辑:유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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