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원철
'소궁둥이 두드리지 않아도 출세'라고 시골출신 신세에 한껏 꺼져있던 나를 하늘이 봐주었는지 어렵사니 대학문에 들어섰고 이어 저마다 선망하는 기자직업에 행운스레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모든게 신났고 아침이면 힘솟고 부러운게 뭔지 모르는 하루하루였다. 그 랑만과 상상은 내가 《연변일보》 소식부에서 농촌부로 옮겨 간 이듬해인 1984년 이듬해 봄까지 내처 식지 않고 이어졌다
그 무렵, 직장에서는 의무헌혈 동원이 있었다. 헌혈후유증이 도대체 있는지 없는지 세간에서 찧고 까부는 탁상공론이 부정쪽이라 하게 편파적으로 기울가해서 썩 석연치 않으면서도 신참이 나서지 않고 누가 하겠는가 하는 오기로 일찌감치 지원했다. 젊음이 넘쳐 겁날게 없던 20대 초반 시절이였다.
나는 직장의 수혈지원자 10여명과 함께 당시 신화가 1호 《연변일보》사 맞은 켠 하남다리 바로 건너에 있던 주혈액관리소로 찾아갔다. 팔을 걷고 대기하고 있는데 당시 내가 소속해 있던 농촌부의 박경섭 부주임이 자전거를 타고 급하게 찾아왔다. 그는 다짜고짜 “자넨 어느새 이름을 올렸나? 장가도 가지 않은 총각인데 수혈하면 어쩌나, 내가 대신 할 테니 얼른 빠지게.” 하고는 나를 대기하고있던 줄에서 무작정 당겨냈다. 나는 괜찮다면서 고집하다가 박경섭 부주임이 하도 힘주어 밀어내기에 결국 빠지고 말았다.
물론, 지금도 수혈이 인체에 해롭지 않다는 의학적 해석에는 이의가 없다 하더라도 그보다도 그런 의학상식을 모를리 만무할 박경섭 부주임일텐데 다만 신참의 만일을 걱정하여 그처럼 헌신적으로 나왔을 게 분명하니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난다.
당시 박경섭 부주임은 가슴이 뜨겁고 마음이 비단결 같이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지극히 의로운 중견선배기자였다. 홍춘식 주임과 손발이 착착 맞았는데 기사를 놓고 서로 시각차이가 있더라도 괜스레 떠드는게 아니라 차분하게 변론하고 조용히 끝내버리였다. 그러고도 신참한테 은근슬쩍 주임을 험담하는걸 듣지 못했고 대신 주임이 누구보다 정책에 해박하니 가까이에서 계실 때 많이 배워둬야 한다고 자주 당부하는걸 잊지 않았다. 정, 부 두 주임의 손맞춤에서 나는 찰떡궁합의 의미가 뭔지 몸으로 익힐수 있었다. 박경섭 부주임은 그 때까지는 30대 후반의 장년이였으니 돌이켜 볼수록 년령보다 한참이나 일찍 거치른 세파를 이겨낸 어른이였다. 홍춘식, 박경섭 두 주임은 직장생활에서 한낱 햇내기인 나한테 공직과 일상의 곧은 좌표를 몸으로 맞춰 준 계몽스승이였다.

80년대 초반《연변일보》 농촌부 홍춘식 주임과 박경섭 부주임(왼쪽)
물론 나한테 와닿은 부주임 박경섭선배의 인간적 의리와 배려의 숨결은 결코 수혈을 대신해준 에피소드 하나만에 그치는게 아니였다.
그 무렵 취재차 훈춘에 내려가 있는데 삼가자진의 한 보통 농민이 초지를 도맡고 대형 방목장을 꾸린다는 1면 톱기사 취재감이 있으니 그걸 취재해서 '물고'오라는 주임의 전화를 받게 되였다. 그때 신문사 기자들에게 톱기사는 말그대로 직업중 첫손 꼽히는 절체절명의 '중대사'였고 부문이 서로 다른 편집부마다 모두 톱기사 발견과 발굴에 사활을 걸다싶이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그만큼 톱기사를 한편 쓰게 되면 기자적 능력을 성큼 인정받게 되는건 물론, 년말 실적 평가에서도 비중있게 다뤄질만큼 이중삼중으로 중시받는 코너였다.
신참이 술덤벙, 물덤벙하다가 괜히 톱기사에 흥분한 나머지 일을 그르칠가 걱정스러웠는지 박경섭 부주임이 멀리 훈춘으로까지 우정 찾아왔다. 박경섭 부주임은 우리가 묵은 훈춘호텔에서 이 취재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사전작업을 까근히 토의해 나갔다. 톱기사가 차지하는 비중, 나아가 여기에 뿌리는 심혈을 절대 가벼운 허드레일로 받아들일수 없는 긴박한 분위기를 가늠할수 있는 대목이였다.
“면봐로 문제를 잡으면 오총편집이 톱기사로 싣겠다고 약속한 기사인만큼 한치의 허점도 있어서는 안되겠소. 특히 동무가 어디에 중심을 주고 어떻게 취재하고 집필하는가 직접 고험할 료량으로 우정 선색만 알려 준거니 이번 기회에 각별히 기자적 감각을 보여줘야 하오..”
오총편집이란 당시 신문사 사장을 겸직하고 있으면서 조선족언론의 살아있는 사전같이 받들리던 오태호총편집을 이른다. 나중에 《길림신문》사 초대사장, 총편집까지 겸임한 덕망있는 원로 언론인이다.
박경섭 부주임은 주선취재에 필수적이라 할 질문테마를 까근히 체크하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한참이나 방안을 서성거렸다
“동무한테 첫 톱기사로 될만큼 오총편집이 꼭 단독 면담을 가지고 기사와 관련된 내용들을 무엇이든지 물을수 있으니 알아 올만큼 다 알아와야 하겠소. 상세히, 까근히 장악할수록 능란하게 대응할수 있는거요.” 불가예측적인 다양한 가능성까지 꼼꼼히 챙기라는 신신당부였다.
훈춘에서 써 가지고 온 기사를 퇴근림박에 교부하고 “판결”을 기다리는데 이튿날 아침 출근하자바람으로 홍춘식 주임이 오총편집께서 부르니 찾아가라고 손짓하였다. 기다리던 순간임에도 몸이 마구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오총편집이 찾을 때 불리워 가서 치하를 바라는건 한낱 사치라는건 온 신문사 울안에서 다 알고 있다. 대신 까다롭고 혹독한 질문이 이어지고 어정쩡하게 답복하면 낯뜨거워나는 추상같은 꾸중이 한타스 차례진다는걸 각오하고 있는게 어쩌면 불가결의 심리 작업이였다. 그래도 총편집이 불러준다는 세절이 모종의 긍정이 깔려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나 다름없기에 오총편집의 부름을 받지 못한 편집기자들은 은근히 머쓱해 하고 있었다. 그때도 나의 선배님들중에서 오총편집의 일대일 '점고'에 외면되여 서운해하는 편집기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오총편집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내가 기사를 쓴 원고지를 손에 든채 나를 똑봐로 응시하면서 기사외의 부차적 화제 예닐곱개를 곁가지 치기식으로 련거퍼 물었다. 박경섭 부주임이 미리 귀띔해주어 사전에 파악해두었기에 그런대로 어렵지 않게 대답할수 있었다. 대체로 오총편집은 핵심테마를 주변과의 련계속에서 포괄적으로 관찰하고 예리하게 분석하는가 하는 편집기자의 잠재적 능력을 데스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질문관은 넘기였겠지 하고 일찍 쾌재를 부른다면 섣부른 착각이다. 여지껏 들어 온 오총편집은 그렇게 순순히 나를 놓아줄 만치 록록치 않았다. 과연 오총편집은 기사를 쓴 원고지를 흔들면서 나를 닦아세웠다.
“동무는 원고지에 몇글자 오려놓으면 만사대길인줄 아오? 기자라면 사업태도부터 똑바로 가져야지, 툭 찍어 말하자면 글자부터 단정해야 한단 말이요. 동무가 썼다는 이 글자를 보오. 이게 대학생이 쓴 글자요? 이 엉망을 누가 알아본단 말이요, 이 따위로 어지럽게 갈기겠으면 쓰지 말란 말이요! 기자를 아예 하지 말든지, 들었소!?”
결국 속으로는 "과연 명불허전이게 무서운 독종이구나..”하고 속으로 새김질하며 “명심하겠습니다.”하고 사과하기 바쁘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내가 돌아오자 박경섭 부주임은 시무룩히 웃으며 다가왔다
"고비 무사히 넘겼겠지?"
"네, 욕은 얻어터지도록 뿌옇게 달고왔지만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은데요".
이틀뒤인 1984년 4월24일 《연변일보》화요일판에 내가 취재한 이 기사는 <소사양전문호 한성범형제 방목지 2000헥타르 도맡고 상품소 대량 생산에 >라는 표제로 1면 톱기사로 실렸다. 버젓하게 내 이름으로 나갔다해도 실은 박경섭 부주임의 지혜를 딛고 잉태된 작품이였다.
다음해 4월에 나는 새로 창간된 《길림신문》사에 옮겨 오면서 아쉬운대로 박경섭 부주임과 갈라지게 되였다.
직장이 다르다 보니 길에서 흔치 않게 오래만에 만나도 수인사나 나누고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그렇게 제딴에는 앞만 바라보고 달리느라고 허둥지둥하는 사이 40년이 넘는 춘하추동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
퇴직후 나는 그동안 경황없이 살면서 박경섭 부주임과의 만남도 변변히 마련하지 못한 죄책감에 부끄러움을 안은채 댁을 찾아갔다. 어느덧 80고개를 넘긴 박주임의 머리는 온통 눈부시도록 희끗희끗해 졌어도 워낙 미남형으로 굳어진 준수한 얼굴에는 여전히 훈훈한 젊음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방정맞게도 그날 따라 혈압이 불시로 무섭게 올라가는 바람에 나는 오래만에 만난 박주임과 아빠트 현관에서 몇마디 못 나눈채 병원으로 부랴부랴 떠나가게 되였다. 들여다 보면 얼굴이 간지러워나는 싱거운 만남이였다. 하도 미안해서 지난해 국경절 무렵에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도 나의 사정으로 박경섭 부주임 부부와 사진 한장 남기고 이야기는 오래 나누지 못하고 말았다. 대신 나는 또 '빚'을 지게 되였다. 박주임은 내가 들고가 소정의 선물은 사양하다가 마지 못해 받으면서도 내가 갖고 간 용돈을 건네려는 순간 어느새 먼저 탁자우에 진작 준비해두었던 500원을 기어이 나의 궤춤에 찔러 주었다. 뿌리쳐도 도무지 안되였다. 갖고 간 돈은 하도나 집요하게 뿌리치기에 건네지도 못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사은으로 드리는 돈이라도 상대가 철통같이 틈 안내주면 도무지 건넬수 없다는 사실을 인생 처음 박경섭 부주임한테서 새삼스레 읽을수 있었다. 40여년이 흘러간 지금에도 박경섭 부주임은 이미 퇴직까지 한 당년의 부하를 그냥 썩 어린 후배로 아끼고 있었다
회포도 풀지 못한 아쉬움에 나는 직장생활에서 나의 길잡이가 되여 사랑을 뿌려준 선배님들과 세간의 어른들을 기리여 몇해전에 썼던 글 <어른>을 보내주었다. 물론 글에는 박경섭 부주임과의 연분을 다룬 부분도 있었다. 게으르다못해 간행물에 실려서 다섯해만이였다.
항상 빚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고싶어 올 초겨울에 나는 박주임사모님앞으로 겨울철 털 스카프를 주문하여 보냈다. 박주임은 사모님이 택배로 받은 양털스카프를 두르고 찍은 사진과 함께 위챗으로 말하면 짧다하기 어려운 글을 보내왔다. <어른>을 읽은 소감도 있었다.
"...
오후 4시 30분에 부쳐온 목도리를 받았소 마누라는 남녘 한끝에서 명품을 사보내주니 고마워하면서도 부담을 준 같아서 무척 송구해 하오.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준 것만으로 넘치게 받은 같고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지 말자 했는데, 이렇게 되였구만...
그때 보내준 <어른>이라는 글도 고맙게 읽어보았소. 거의 다 잊어버렸댔는데 글에서 다시 되풀이 해주어 감회가 새롭구만.
글에서 나와 관련한 일화도 곁들어주어 감사하오만 나에게는 과분한 필묵이여서 부끄러웠소.
농촌부에서 부주임이라는 감투를 몇해 달고 다녔어도 기실 부주임구실은 제대로 해본 같지 않소. 나가면 취재하고 들어오면 편집하고... 다른 편집기자들과 거의 같이 뛰여다닌 같소. 그게 오히려 나에게는 편하고 좋았소. 그래서 나는 부주임이라는 부름이 민망하고 싫었소..."
당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민족신문사업에서 젊은 시절부터 일생에 혼신을 묵묵히 불살라 온 한 언론인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샘물같은 고백이였다. 자신을 한껏 낮추는 아량에 고개가 숙어졌다. 저도모르게 이쁨 자랑에 급급해 할세라 봄기별만 알리는데 골몰하면서 눈서리속에서도 타고난 운치를 잃지 않는 매화가 떠오른다.
오늘도 나와 박경섭 부주임의 40여년 우정은 연길과 룡정사이에서 흔들림없이 위챗으로 예이제 없이 이어지고 있다. 주고받는 문자는 장황하지 않고 단 몇마디뿐일지라도 서로 이모티콘을 보내고 받는 날마다의 아침은 그토록 싱그럽고 풍요롭다. 무서운 것 없이 뭐나 닥치는대로 부딪쳐보고 싶었던 젊은 투지에 신심과 용기를 뿌려주고 힘차게 불을 지펴준 어르신들이 그지없이 고맙고 숙연해진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깃털눈을 바라보다가도, 키보드를 한참이나 여념없이 두드리다가도... 홀제 보이지 않는 어른이 뒤에서 묵묵히 지켜주고 있다는 오늘을 상기하면 금시 온 몸이 따스해난다.
리원철 프로필
언론인, 출판인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선후하여《연변일보》사, 《길림신문》사, 연변인민출판사 기자, 편집으로 근무, 직함 편심.
2001년3-12월 한국 《조선일보》방일영문화재단 펠로우, 2003년 한국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언론학 석사.
2011년 길림성인민정부 ‘장백산문예상’ 평심위원.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