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녀
어느 누구의 칼럼 글 서두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사진 한장이 눈길을 끈다.’그게 전부였다. 서두에 끌려 본문까지 읽고 나니 나도 서랍 속에서 오래된 사진 한장을 꺼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진을 찾아드는 순간, ‘기념비 앞에서는 사진을 찍지 말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그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끝없는 추억이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는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는 내가 교원사업을 시작 한 지 얼마 안되는 30대 초반의 시절이였다. 그 시절 반주임들은 청명절과 추석명절이면 학생들을 데리고 렬사기념비를 찾았다. 경모의 마음으로 기념비를 위문하고, 소선대 입대식이나 초청보고가 있을 때면 그곳에서 모였다. 학생들은 흰 대복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엄숙한 표정으로 대례를 올렸다. 혁명선렬들의 희생을 마음 깊이 새기는 듯 했다.
평소 장난기 많던 아이들도 렬사비에 드릴 꽃을 만들 때는 점심시간에도 밖에 나가지 않고 정성스럽게 꽃을 만들어 책상 우에 반듯이 놓았다. 남학생들은 벼짚으로 화환틀을 엮었고 녀학생들은 꽃을 하나하나 달았다. 이튿날 전교 학생들이 학년별로 기념비 앞에 화환을 드리고 선서를 했다. 그 후에는 영웅 이야기를 목청 높이 랑송했는데 이야기는 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눈물을 흘리며 오늘의 평화가 얼마나 값진지 깨닫는 순간이였다. 랑송이 끝나면 아이들은 기념비 주위를 깨끗이 쓸고 작은 돌들을 주었다. 나는 그런 활동을 수없이 지도하며, 기념비 앞을 혼자 다녀도 무섭지 않게 되였다.
한번은 학생의 학습지도를 늦게까지 하고 나니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 아이에게 저녁을 먹이고 자전거에 태워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가는 길에 공동묘지와 기념비가 보였다. 잠시 무서웠지만 렬사기념비를 바라보자 마음이 담대해졌다. 그 학생을 무사히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칠흑 같은 밤이였지만 마음속에는 기념비가 또렷이 떠올랐다. 사실 그때는 매우 무서웠다. 공동묘지와 기념비 뒤에서 누군가 뛰쳐나와 길을 가로막는 듯했다. 그곳을 지나치면서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오싹 끼친다.
다시 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렬사기념비 앞에서 활동하며 성장한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되였을까?
기념비 앞에서 붉은 넥타이를 맨 채 나란히 선 네 명의 대대위원 아이들, 그 이름을 불러본다. 김파, 김화, 흥국, 신영호. 작년 설에 김파 제자를 30년 만에 만나 그 아이들의 소식을 들었다. 김화는 청화대학 수학과 박사 교수, 신영호는 하문대학 박사 교수, 김흥국은 북경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에서 살고있고 초연은 상해법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설에는 제자들과 영상통화도 했다.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 나는 렬사기념비 앞에서 찍은 그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핸드폰을 펼쳐 그들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어내려가 본다.
“제가 엄마 일찍 돌아가셔서 선생님이 엄마처럼 대해주셨는데, 여직껏 인사 못 드린 거 무릎 꿇고 사과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집주소 보내주세요. 소고기 세트 샀는데 선생님 부근 슈퍼에 놓고 갈게요.”
“선생님, 너무 보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모시러 가겠습니다.”
“북경에서 공부 마치고 지금 하문리공대학교에 근무 중입니다. 올해 초에는 서울대 방문학자로 나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선생님 덕분입니다. 이렇게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희들은 참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교원으로서, 반주임으로서 자부심과 긍지가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렬사기념비 앞에서 선서하며 성장한 그 시절의 다른 아이들은 또 얼마나 대견하게 자랐을까?
세월이 류수처럼 흘러가 어언 40대, 50대가 된 수많은 나의 제자들, 그들은 반짝이는 별이고 나라의 든든한 기둥이다. 그렇게 소리높이 자랑하고 싶다.
나는 렬사기념비 앞에서 찍은 이 한 장의 사진을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