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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야기26]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발표시간: 2026-05-12 10:13       출처: 选择字号【

◎김시린

세월이 쏜살처럼 지나간다더니 나도 어느덧 60세를 넘긴 로년기에 들어섰다.  생활형편이 펴이면서 나도 남들과 같이 각종 무료 운동시설을 다니며 신체단련을 한다. 몸을 단련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고 유쾌하다. 그런데 겨울철 스케이트를 탈 때면 지금도 알지 못할 '낯선 친척'에게서 얻었던 스케이트를 생각하며 그분들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갚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50여 년 전, 내가 열두어살쯤 되던 지난세기 70년대 중반쯤이였다. 큰형님이 대학을 졸업하고 월급쟁이가 되여 오랜 가난때문에 자주 만나뵙지 못했던 룡정 외삼촌을 찾아가 보라고 어머니에게 차비와 용돈을 대주었다. 어머니와 큰형님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우리집이 있는 왕청에서 기차를 타고 도문에서 하루밤을 묵은 뒤 다시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먼 길이였다. 나는 기차를 타 보고 싶은 마음에 꼭 따라가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예전에도 둘째형님이 북경에 갈 때 따라가려 했지만 마을 끝 다리에서 쫓겨난 아픈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을 터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하고 졸랐다. 어머니는 “안 된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지만 나는 몇 번이고 떼를 썼다. 옷은 형님들이 입다 버린 낡은 옷뿐이였고 그런 꼴로 친척집에 가는 것은 어머님도 허락할 수 없는 일이였던 것 같다.

떠나는 날, 뻐스에 오르려는 나를 큰형님이 쫓아내 결국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기차를 타 보는 것이 소원이였다. 뻐스가 떠난 뒤 나는 왕청 역전으로 가는 산길을 달음박질했다. 역전에 도착하니 다행히 기차가 오기 전이였다. 대합실은 사람들로 붐볐고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숨죽여 어머님 일행을 찾았다. 큰형님 눈을 피해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엄마” 하고 부르자 어머님은 무척 놀라면서도 내 얼굴의 땀을 닦아주셨다. 큰형님은 나를 집에 돌아가라 윽박질렀지만 어머니가 한사코 따라나서는 나를 떼놓기 난처했는지 결국 허락하여 나도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도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큰아주머니가 나에게 새 웃옷을 사 입히고 리발관에서 머리를 깎아주었다. 밤이 되면 자주 정전되던 시골에서 자란 나는 밝은 전등 아래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가지를 처음 구경했다. 백화상점과 리발관, 그리고 불이 켜진 밤길은 내게 생전 처음 보는 환상적인 풍경이였다.

다음 날, 조양천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룡정으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어머님이 교장인 외삼촌 집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하자 옆에 있던 한 누나가 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쉽게 외삼촌 집에 도착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도시의 외삼촌집에서 며칠을 지내보았다. 며칠 후, 어머님을 따라 여러 친척집을 다녔다. 그중 한 집에서 점심으로 ‘드리장’을 끓였는데, 배고프던 시절이라 더욱 맛있게 먹었다.

어른들이 이야기할 때 나는 밖에 나가 놀았다. 그런데 그 집 헛간벽에 스케이트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갖고 싶었다. 집에 들어와 어머님께 스케이트를 달라고 조르자 어머니는 “안 된다”고 막아 나섰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계속 떼를 썼다. 집 주인분은 “그게 우리집 아들이 타는 것이라 마음대로 줄 수 없다”고 하셨지만 나는 계속 칭얼거렸다. 내가 하도 끈질기에 떼쓰자 결국 그분은 “애가 자꾸 욕심내니 어쩔 수 없네, 가져가거라” 하셨다. 나는 바로 창고로 달려가 스케이트를 목에 걸었다. 그렇게 나에게 생긴 스케이트는 내 자랑이 되였고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스케이트를 타며 실력을 익혔다. 지금 60이 넘어서도 얼음판을 날듯이 달릴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스케이트 덕분이다.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당년의 일들이 떠오른다. 내 어머니의 ‘면목’으로 아들의 소중한 물건을 내게 준 그분에게 감사의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와 어떻게 되는 친척인지조차 나는 모른다. 지금쯤 그분도, 그분의 아들도 늙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후손이 있을 터이니,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옛날 이야기를 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연유를 모르니 막막하기만 하다.

할머니 가문 쪽으로 추측해 련락해 보았지만 “다 죽은 사람들을 왜 자꾸 기억하느냐”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머니 생전에 물어볼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 이렇게 되였으니 통신과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찾아 볼 길이 없다. 결국 나는 어머님과 그분께 영원히 갚지 못할 마음의 빚을 지고 말았다.

친척 관계에는 물질적 교환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굶주리던 시절, 가난한 나를 데리고 간 어머님께 친척들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귀한 음식을 대접했으며 더우기는 자식의 소중한 물건까지 내여 주시였다. 그것은 린색함이 아닌, 서로 통하는 따뜻한 인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싶다. 부모님과 그 분들은 근면과 인정으로 그 시절 어렵던 가난을 이겨내셨고 덕분에 우리는 풍요로운 오늘날을 살고 있다.

나는 부모님과 그 세대분들께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다시는 갚지 못할 그 빚을 생각하면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그분들이 따뜻했던 인정이 무척 그리워진다. 이제라도 그분들의 소중한 인정세계를 이어받아 친척과 모든 주위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뜻있는 삶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부모님 세대분들께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라고 나는 마음에 새긴다.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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