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기

필자 김성기
1968년 봄부터 발생한 어머니의 알 수 없는 병환에 백약이 무효였다. 우리 집안은 아버지 어머니와 녀동생 셋이 있었으나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은 내가 맡아 하였다. 어머니는 생산대 힘든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아픈 배를 움켜잡고 모진 아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강한 성격의 소유자이건만 아픔을 참느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좀 지나면 아픔이 멎었는지 정주방에 가서 쌀을 일어 밥을 지으셨다. 나는 위안만 할 뿐 어쩔 수 없었고 늘 걱정으로 가슴만 죄였다.
모내기가 끝나자 대대병원에 갔다. 회충병이란다. 처방약을 먹어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공사병원에 갔다. 위장염이라 한다. 주는 약을 먹어도 효험이 없었다. 서란현병원에 가니 맹장염이라 한다. 점적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도 효험이 없었다. 맹장부위를 눌러 봐도 아픈 증상이 없었다.
우리 마을에는 누가 아프거나 병원에 갔다 오면 동네 아낙네들이 찾아와 위문하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였다. 그날도 동네 아줌마들이 한방 모였다. 그때 어머니 친구 되는 분이 할빈인애병원에 가 보란다. 할빈인애병원은 조선족병원으로서 조선족들의 최고 우상병원이였다. 나는 이튿날로 한창 자라고 있는 돼지 한 마리와 짜 놓은 가마니 스무 장을 팔고 생산대 돈 20원을 빌려 85원을 장만해 가지고 할빈인애병원으로 향했다.
할빈 인애병원의 진단 결과 자궁염이라서 의사선생님이 오늘 입원하고 래일 아침에 수술 받자고 하셨다. 수납창구에 찾아가니 입원침대비 10원에 치료비 45원, 합계 55원을 내라 하였다. 남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할빈역에 가서 쪽잠을 자고 이튿날 새벽에 병원에 찾아갔다. 어머니는 아침 9시에 밀차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갔다. 약 한 시간 걸릴 것이라 했다. 그런데 20분도 안 되여 밀차에 실려 갔던 어머니가 걸어나오셨다. 의사의 오진이였다. 다시 검사한 결과 위궤양이라 했다. 당일로 약 한 봉지를 받아서 오후차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약을 드셔봐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할빈인애병원에 갔다 온 지 사흘째 되던 저녁이었다. 어머니 동갑내기 한 분이 찾아와 흑룡강 오상에서 한 역전 거리인 조선족마을 두가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였다. 두가 조선족마을에 리관식이라는 대대병원 의사가 병을 용하게 잘 보는데 의술이 고명해 소문이 자자하다고 했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중풍환자가 단 침 서너 대를 맞고 걸어서 집으로 갔다느니, 맥을 잘 짚는데 어느 큰 간부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간복수 치료를 받고 20일 만에 완쾌되여 선물로 범뼈 두 개를 주고 갔다는 소문도 돌았다.
두가라 하면 우리 소성에서 할빈 거리의 절반 거리도 되지 않았다. 나는 본래 귀가 얇아 멀지 않으니 두가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물론 어머니는 할빈의 큰 병원에서도 치료 못하는데 조그마한 대대병원 의사가 뭘 알겠냐며 모든 것을 포기했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유일한 기둥이고 로력이였다. 어머니가 잘못되면 집안이 망한다. 아버지도 가보라고 극구 권했다.
이튿날 무작정 두가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을 찾아가니 점심때라 문이 잠겼고 병원 옆 입원실에는 어머니 나이와 비슷한 조선족 아주머니 셋이 점심식사를 하고 계셨다. 의사선생님을 물었더니 점심때라 식사하러 갔는데 오후 한시 반이 되여야 온다고 했다. 방금 12시니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 의사선생님 집을 물었더니 병원에서 멀지 않았다. 한시 반까지 기다리기보다 의사선생님 댁을 찾아가 진단받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의사댁을 찾아가려면 빈손으로 갈 수 없다. 공소합작사에 가서 술 한 병과 사과통조림 한 통을 사서 가방에 넣고 의사댁으로 향했다. 의사선생님은 방금 식사를 마친 뒤였다. 보아하니 몸집이 우람지고 50대 나이로서 키가 크고 잘생긴 미남이시였다. 가져온 술과 사과통조림을 상우에 놓으면서 어머니의 병을 길림, 서란, 할빈병원에 다 가보았지만 바른 진단이 나오지 않아 선생님의 고명한 의술 소문을 듣고 찾아왔노라고 사정했다. 의사는 생각밖으로 아주 부드럽고 인자했다. 사모님께 이분들이 소성에서 왔으면 점심 식사도 하지 못했겠는데 점심상을 있는대로 차려오라고 했다. 우리가 차에 내려서 간단히 먹고 왔다고 굳이 사양했지만 믿지 않았다.
얼마 안되여 사모님이 뜨끈뜨끈한 장국, 김치에 밥 두 그릇을 차려 내오셨다. 사모님은 50에 가까운 인자한 분이셨는데 흰머리가 많고 이마 주름살이 깊은 것을 보니 풍상고초를 많이 겪어온 분이 분명했다. 배도 고프고 고마움을 사양할 수 없어 식사를 마쳤다.
밥술 놓기 바쁘게 의사선생님은 옆칸으로 가자고 했다. 거기에는 평시에 병 보던 의자와 병원용 책상이 놓여 있었다. 먼저 아픈 증상을 물어보시더니 혀를 보자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더니 맥을 짚었다. 그리고는 오늘 저녁엔 병원 입원실에서 쉬고 오후에 시장에 가서 닭 한 마리를 사서 장만해 두었다가 내일 새벽 5시에 입원실 난로에 어머니가 직접 닭을 푹 삶아 6시에 의사선생님 댁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은 굶고 래일 절대 고기 맛을 보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무슨 병인가 물었더니 자신만만하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묻지 말라고 했다.
의사선생님 댁을 나오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환자더러 닭 한 마리를 삶아 가져오라는 의사는 처음 보았다. 속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환자에 대한 인품을 보아서는 나쁜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분부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후 세 시쯤 두가시장에 갔더니 마침 닭 파는 집이 있었다. 암탉 한 마리를 2원 주고 샀다. 손질도 해 달라고 하니 50전을 더 내면 말끔히 해 준다고 했다. 그렇게 하니 주인이 반시간도 안 되어 손질한 닭을 가져왔다.
그날 밤은 대충 자고 아침 5시에 일어나 난로불을 피웠다. 입원한 손님의 냄비를 빌려 닭을 삶기 시작했다. 온 입원실은 구수한 닭고기 냄새로 진동했다. 정각 6시가 되여 어머니는 푹 익은 닭고기를 냄비째 의사 집에 가져갔다. 리의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삶은 닭을 받아 상우에 올려놓고,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닭고기를 뜯어 입에 넣으며 맛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닭국물 두 숟가락을 그릇에 담아 어머니에게 맛보라고 했다. 어머니가 사양하다가 의사의 권유에 못이겨 국물을 마셨다. 이어 의사가 어머니에게 노란 알약 4알을 주며 물까지 따라 주었다.
약을 드신후 얼마 안지나 어머니가 급히 변소에 가겠다고 했다. 20분쯤 지나 어머니가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왔다. 의사선생님이 무슨 변을 봤는지 묻자 어머니는 주저주저 하다가 마침내 회충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고 했다. 몸이 가뿐하고 날 것 같다고 했다. 리의사는 손으로 무릎을 치며 크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리의사는 밥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회충은 회충약을 먹는다고 바로 배설되는 것이 아니예요. 배가 부르면 회충약을 먹지 않기에 먼저 굶겨놓고 구수한 냄새로 유인하여 회충 머리를 들게 해야 해요. 그다음 회충약을 먹이면 회충들이 배가 고파 얼른 받아먹거든요. 아주머니께 닭을 직접 삶고 내가 먹는 것을 보게 한 것도 회충을 유인하기 위함이였지요."
아침에 리관식 의사는 내가 가져온 술을 꺼내고 사모님은 양념즙을 만들어 우리는 모여앉아 삶은 닭고기로 아침 식사를 함께 했다. 리의사는 닭다리 하나를 뜯어 어머니께 드리며 이제 병이 다 나았으니 마음대로 드시라고 했다.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 치료비는 침대비 80전, 회충약값 32전, 합계 1원 12전이 들었다.
세월이 흘러 어언 5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리관식 의사도 이제는 저세상 사람이 되였겠지만 그 당시 틀거지 없이 환자를 가족처럼 대해주던 그 분의 따뜻한 태도와 '요술' 같던 고명한 의술은 지금도 잊을수 없다.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