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운

필자 신석운
지금 나는 친구의 차를 타고 대전으로 가는 길이다.
차창 밖으로 스미는 봄바람이 유난히 부드럽다. 오늘 나는 대한민국에서 신춘문예 우수상을 받으러 간다. 낯선 도시로 향하는 이 길에서 나는 다시 펜을 든 사람으로서의 설렘과 긴장을 함께 안고있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내가 펜을 놓지 않게 만든 사람, 한 번 멈췄던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해 준 사람... 나는 어쩌면 인생을 두 번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은 김광명 선생님의 붉은 펜으로, 또 한 번은 그 자상한 말씀 한마디로 다시 시작되였다. 눈을 감자, 오래 묻어 두었던 시간이 조용히 되살아난다.
1973년, 한족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시골 마을에서 생산로동에 뛰여들었다. 우리 동네는 열흘에 한 번씩 《료녕조선문보》가 배달되였다. 생산대 대장이던 형님이 꾸준히 주문했기에 나는 그 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문예란의 벽소설과 시, 실화를 외우다시피 읽었고 마음에 드는 글귀는 가위로 오려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모았다. 년말이면 그것들을 묶어 나만의 작은 소설집을 만들군 했다. 그때부터 나는 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기 시작했다.
처음 쓴 글들은 부끄러울 정도로 서툴렀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남의 글을 흉내내는 수준이였다.
1983년, 나는 <호각>이라는 글을 썼다. 형님은 아침마다 ‘호르르, 호르르’ 호각을 불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그 소리가 들리면 백여 명의 일군들이 생산대 마당에 모여 하루 일과를 배치받았다. 그 호각소리는 마치 전쟁터의 나팔처럼 힘이 있었다. 그런데 집체가 해체되고 땅을 농가 단위로 나누는 호도거리(包産到戶)가 시행되면서 호각은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였다. 형님은 아침이면 습관처럼 허공에 입을 갖다 대며 호각을 찾군 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나는 글로 옮겨 《료녕조선문보》에 투고하였다.
열흘 후, 문예란 편집부 김광명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원고 쓰는 법, 제목 다는 법, 문장 구성 등 기초부터 하나하나 짚어 주신 긴 편지였다. 나는 그제야 내가 얼마나 무지한 상태에서 글을 썼는지 깨달았다.
수정하여 다시 보냈지만, 맞춤법과 띄여 쓰기, 단락 구성까지 부족한 허점투성이였다. 스스로 보아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꾸짖지 않으셨다. 두 번째 편지에는 붉은 펜으로 빼곡하게 고쳐진 원고가 동봉되여있었다. 줄마다, 단어마다 세심하게 다듬어진 흔적이 선명했다. 문학에 관한 책과 글쓰기 자료도 함께 보내주셨다.
그 뒤로 나는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 다음 날이면 우체국에 달려가 다시 편지를 부쳤다. 그렇게 <호각>은 열 번이나 고쳐졌다. 일 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비로소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호각>은 나의 처녀작으로 세상에 나왔고 년말에는 '압록강문학상'에서 상패와 상금까지 받게 되였다.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심양에 갈 때마다 조선족 도서관에 들러 소설책을 사 모았고 여러 문예지를 구독하며 혼자서 글을 익혀 나갔다. 어느 날, 김광명 선생님께서 직접 나의 집까지 찾아오셨다. 무거운 여섯 권짜리 조선말사전을 안고 오신 것이였다. “자, 이걸 옆에 두고 글을 써야지.” 사전을 내 손에 쥐여 주시던 순간의 그 따뜻한 손길과 편안한 미소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때부터 사전은 나의 가장 든든한 스승이자 무기가 되였다.
이후 나는 여러 편의 벽소설과 실화를 신문에 발표했고, <형님, 죄송합니다>라는 작품으로 또 한 번 문학상을 받게 되였다.
하지만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2006년, 생계의 어려움으로 나는 한국에 입국해야 했고 펜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먼저였기에 글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때 문득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항상 조용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석운이, 생활이 펴이면 다시 펜을 드세요.”
그 한마디는 세월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서툴지만 다시 시작하였다. 지난해, KBS 한민족방송 글짓기에서 나는 우수상을 받았고 동포문학상과 겨레문학 평론문학상에서도 상패와 상금을 받게 되였다. 돌아보면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결과였다.
내가 탄 차는 어느덧 대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지난날의 생각도 뒤로 하고 눈을 떴다.
김광명 선생님은 아직도 심양조선족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을 뵙지 못한 지 어언 이십 년이 흘렀다. 나는 선생님께 따뜻한 차 한 잔 제대로 대접해 드린 적이 없다. 다만 선생님께서 나의 집을 찾아오셨을 때 투망으로 잡은 물고기를 올린 것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마저도 부끄럽고 송구스럽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한 번도 내 처지를 탓하지 않으셨다. 말씀이 없으셨을 뿐, 오히려 격려의 눈빛을 보내주셨다.
료녕조선족문단에서 선생님은 한 명의 편집자를 넘어, 수많은 젊은 작가들을 길러 낸 등불과 같은 분이시였다. 례호, 김군, 강재희 등 여러 작가들이 선생님의 손길을 거쳐 문학의 길로 나아갔다. 그 붉은 펜 하나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일으켜 세우고 또 수많은 글쟁이들의 길을 열어 준 분, 나 역시 선생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가운데 한 사람이였다.
언젠가 고향에 가게 되면 나는 반드시 선생님을 찾아뵐 것이다. 그때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차 한 잔을 올리고 싶다. 그리고 늦게나마 이 한마디를 꼭 전하고 싶다.
“선생님, 그때 그 붉은 펜이 제 인생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저, 이제는 선생님 말씀대로 펜을 놓지 않을 겁니다.”
차창밖으로 봄빛이 흘렀다. 바람에 살랑이는 연두빛 가지들이 마치 선생님의 붉은 펜 자국처럼, 내게 또 다른 시작을 속삭이는 것만 같다.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