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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 조선민족

“조남기 주석은 대성골안을 세차례나 다녀갔습니다”

-연변군분구 전임 부사령원 김문원이 들려주는 원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의 이야기

김영자      발표시간: 2018-06-23 21:20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연변군분구 전임 부사령원, 안도대성농업종합개발합작사 리사장 김문원선생이 들려주는 원 전국 정협 부주석 조남기의 이야기

2007년 조남기 부주석(왼쪽 네번째 사람)이 안도현 석문진 경성촌 대성골안 김문원의 림지를 찾아주셨을 때 촌민들과 함께 남긴 사진./사진 김문원 제공

머리글: 연변군분구 전임 부사령원 김문원(67세)선생은 걸출한 민족사업 지도자이며 중국인민해방군 현대후근건설의 지도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 부주석이며 중앙군사위원회 전임 위원이며 중국인민해방군 전임 총후근부 부장, 군사과학원 전임 원장인 조남기동지가 서거한 부고를 접한후 6월 21일에 신문사를 찾아왔다.

“가슴이 먹먹하고 애절하기 그지없어 도저히 이 내마음을 눅잦힐 수가 없습니다.조남기 주석(주:전국정협 부주석의 략칭)이 저희 대성골안에 친히 찾아오셔 저의 손을 잡고 저한테 하나하나 일러주시던 그때의 정경, 그때의 매 한마디 말씀이 어제런듯 생생히 떠오름니다. 이‘숙제생'의‘숙제'를 한번 더 보셔주실 줄 알았는데 ... ”

그때의 그 정경을 적으려고 필을 찾아들었다가 밤을 패고 신문사를 찾아온 사연을 말씀하는 김문원선생은 기실 손잡이뜨락또르 발동 수동쇄에 손목을 크게 다친 미열로 글쓰기에 무리한 상황이기도 했다.

김문원선생의 군복무기간은 37년, 그는 전사로부터 시작해 반장, 패장, 련장, 영장, 퇀장, 군분구 참모장, 부사령원 ‘계급장’까지 달았고 로산변경자위반격전, 산불끄기, 홍수에 훼손된 기초시설 건설 등 중대한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 2등공, 3등공 수차, 심양군구뢰봉영예상장 2차 등 많은 영예를 수여받았으며 연변주인대상무위원회 위원 등 직무를 지니기도 했던 분이다. 2004년에 부사령원직에서 은퇴한후 그는 여러 기업이나 단체조직의 특별 초빙을 마다하고 바로 귀향해 지금은 안도현 석문진 대성농업종합개발합작사 법인대표, 리사장이란‘농’자 ‘인솔자’로 되였다. 황산을 ‘림해’로,‘금산’으로 만들어가고 있으며 시골의 빈곤촌, 빈곤농민들을 치부에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길림성당위, 정부, 그리고 길림성군구로부터‘변강군중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모범’이란 영예를 수여받기도 했다.

“제가 ‘제2전역'(은퇴후 귀향 창업을 말함)을 시작해 10여년간 초심을 잊지 않고 바른 길을 개척해가면서 농민들을 이끌어 저그마한 성적이라도 거두었다면 거기엔 조남기 주석의 교시와 고무, 배려, 관심이 고스란히 슴배여 있습니다.”

“그이는 저의 훌륭한 지도자, 훌륭한 인도자(带路人), 훌륭한 스승입니다. 그이야말로 저를 오복투지(五腹投地)하게 한 분입니다.”김문원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머금었다.

“세여보니 조남기 주석을 만난 회수만 열 서너번은 족히 되더라구요. 그토록 자상하시고 상상할 수 없이 사려가 깊고 넓으며 멀리 내다 보시는 분임을 번번히 깊이 느꼈습니다. 후배, 후대들에 대한 기탁 또한 절절했습니다....”

조남기 주석과 김문원선생 두분의 인연은 김문원선생이 귀향한 후부터였는데 김문원선생이 들려주는 조남기 부주석의 이야기는 김문원선생의 말대로“로장군님이 로병사에 대한 인도와 기탁이였고 국가 고층간부와 기층간부, 인솔자(带头人)와의 이야기이며 궁극적으로는 그이가 마음속에 백성과 미래를 담은 이야기”이다.

조남기 부주석에 대한 김문원선생의 추억과 추모의 감정을 그대로 담기 위해 기자는 기사를 1인칭으로 정리해냈다. 

(1)그이는 저더러 식수를 잘 하도록 고무했습니다

조남기: “너(나무)도 자라고 ‘나’도 자라서 나라의 재목으로 되자”

2007년 조남기 부주석(왼쪽 첫 사람)이 대성골안 김문원(왼쪽 네번째 사람)의 림지를 찾아주셨을 때 남긴 사진. /사진 김문원 제공

저는 제가 농민의 아들임을 잊은 적 없었고 고향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은퇴후 고향에 가서 제가 할수 있는 일을 하면서 고향건설에 적은 힘이라도 이바지하고 싶은 것이 저의 꿈이였습니다. 그래서 2004년 은퇴한후 저는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고향 안도현의 석문진 경성촌에 가서 황산에 재생림지가 섞인 대성골안 산(213.07헥타르)을 임대해 식수조림을 시작했지요. 조남기 주석은 연변 주요 책임자들과 식수조림을 의논하던 중 귀향해 식수조림을 한다는 저의 이야기를 듣고는 2007년 8월 15일에 대성 골안까지 찾아주셨습니다.

제가 부사령원으로 갓 발탁된 지난 세기 90년대 중기에 연변군분구를 시찰 오신 조남기 주석과 공식적으로 첫대면을 가진 후 10년만에 만나뵙게 된거죠. 촌마을에서 제가 식수하며 살고 있는 산꼭대기 외톨집까지 올라가자면 10여리되는 흙길을 지나야 했는데 그 전날 내린 큰비로 구간이 흙탕길로 되였지만 조남기 주석은 끝내 저와 함께 그 길을 동행했습니다. 전기도 안들어간 ,제가 살고 있는 외톨집까지 살펴보고 거기서 500메터 떨어진 림지에까지 기어이 걸어가시여 나무들을 살펴보시며 “자네, 식수할 생각을 잘했네. 장한 일일세. 당과 군에서 자네를 헛되이 양성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네. 시작한바 하고는 초심을 잊지 말고 견지하길 바라오.”하며 저를 치하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나는 그때 그이의 말씀에서 강한 힘과 용기를 얻었으며 내가 한 선택에 대해 더한층 확신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2009년 8월 5일, 저는 그이가 재차 저희 골안을 찾아주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그 때 저는 이미 5만여그루의 잣나무를 심었고 나무들은 무성해지고 있었습니다.

‘자네 참 큰 일 하고 있구만. 식수하는 자네는 자네가 군에서‘장군’으로 있을 때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하네.”하면서 그이는 “식수조림은 지구에 리롭고 인류에 리로우며 국가에 리롭고 사회에 리로우며 개인에게도 리로운 장거요...”하며 식수공정에 내포된 풍부한 내용들을 저한테‘보충 강의'해주었습니다.

“자네가 자네 주머니를 털어 식수한다는 건 사회에 대한 공헌으로서 그 의미가 크네.”라고 말하면서 그이는 저한테 3가지 일을 잘하라고 당부하시였습니다.

즉 개인적으로 옳바른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으로 고상한 지조를 키워야 하고 식수조림 지원자(志愿者)대오를 양성하여 공민들의 식수의식, 환경보호의식을 키우도록 영향주어야 하며 차세대를 잘 양성해야 한다는 당부였습니다.

그이는 저의 식수조림공사에 “너(나무)도 자라고‘나’도 자라서 나라의 재목으로 되자”는 주제를 제시하시면서 차세대 교육양성사업프로그램 가입의 의미까지 부여해주었습니다.

저는 조남기 주석의 가르침대로‘숙제'를 하나하나 진지하게 풀어가며 보람차게 ‘답'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현재 저의 조림지에는 소학생으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장군으로부터 현역군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각 분야 애심협회 인사들, 각급 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사업일군들과 학생들을 포함해 식수 지원자들이 해마다 200여명씩 다녀가고 있습니다.

저의 전우들을 비롯한 군인 지원자들이 찾아와 식수해‘전우림'을 세웠는가하면 주 및 안도현 그리고 연변대학 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와 손잡고 간고분투, 식수, 환경보호 등 관련 전통교육장소를 만들었으며 학생들과 함께‘희망림’림지와 기념비도 만들었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대상해 전통교육강의를 시작한지도 어언 5년이 되였습니다.

2009년에 오셨을 때 조남기 주석은 한키 넘게 자란 나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면서 “자네가 심은 나무가 숲을 이루어‘림해’로 된걸 보니 해변가에서 일망무제한 바다를 마주한듯 가슴이 후련해나고 기분이 유쾌해지네!”하며 저의 꽛꽛한 손을 잡아주시면서 “자넨 젊은 몸이 아니니 너무 힘에 부치게 일하지 말아야 하네. 집도 ,로임까지도 온갖 재산을 다 여기에 부어넣고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을텐데 말이요.”하고는 저의 집사람더러 저의 건강을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하시는 것이였습니다.

조남기 주석은 2011년 8월 24일에 세번째로 저희 골안을 찾아주셨습니다. 그번에 그이는 “나무를 심어도 과학적으로 심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과학적으로 심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관리하여 국가와 개인을 위해서라도 재부를 창출해내야 할세. 나무들이 다 재목이 되고 특히 잣나무는 열매가 많이 달리도록 연구해야 하네.”,“반드시 생태, 사회 , 경제 세가지 효과성을 창출해야 하네.”

그러면서 그이는 동행한 연변주림업과학연구원 현영남 원장에게 림업연구원에서 저를 과학적으로 잘 지도하고 부축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3년째 림업국과 림업과학연구원에서는 저를 적극 돕고 있습니다. 정책적 지지를 받는 과학실험기지까지 설립해 실험작업을 본격화했습니다.

2009년 조남기 부주석이 대성골안 림지를 돌아본 후 김문원 부부와 함께 남긴 사진.

/사진 김문원 제공

지금 저의 림지에 심은 잣나무 14만주, 이깔 4만주, 홍피운삼 5만주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주석께서 다녀가신 후로부터 저는 저희 내외의 손을 꼭 잡아주시던 조남기 주석을 그리면서 매일이다싶이 잣나무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군하였습니다. 며칠전까지만해도 저는 갓 달린 잣송이 800여개를 바라보면서 “올해 주석께서 연변에 오시면 꼭 저 잣을 맛보시게 해야지!”라고 별렀었는데 그이가 이렇게 총망히 돌아가시다니...

(2)그이는 저더러 농민들을 치부의 길로 이끌게 했습니다

조남기: “<농민전업합작사법>은‘3농'문제를 해결하고 농민들의 치부문제를 해결하며 공동히 치부해감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방식”

2011년 8월 24일, 조남기 주석이 세번째로 저희 골안을 찾았을 때였습니다. 당시 그이는 이미 심은 나무가 15만그루라는 회보를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이제는 완연히 수림이 우거진 록주로 변했네 .”라고 말하고는 저에게 한마디 부탁했습니다.

“내 자네한테 새로운 숙제를 줘야겠네. 이제부터 식수도 하고 관리도 잘함과 동시에 자네 주변의 백성들을 이끌어 치부의 길을 개척해보게. 우리부터, 주변부터 이끌고 가느라면 빈곤에서 벗어나 치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가 ?”

그리고는 수행한 간부들에게 저의 사업을 지지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아무튼 저의 외톨집에 그후 전기가 들어왔고 등짐을 지고 걸어다니던 6리길도 세멘트포장도로로 변모되였습니다. 그 길은 경성촌의 전간 생산도로였기에 저 뿐만아니라 많은 촌민들도 혜택을 보게 되였습니다.

조남기 부주석께서 그날 김문원에게 새로운‘숙제 '를 포치하고나서 함께 남긴 사진.

/사진 김문원 제공 

조남기 주석이 다녀간 이튿날인 2011년 8월 25일, 저는 부름에 응해 조남기 주석의 거처로 찾아갔는데 그날 그이는 저에게 옹근 2시간 남짓한 “특강”을 해주셨습니다.

그이는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군인이고 당원이네. 아직도 소궁둥이 두드리며 농사를 짓던 시기가 아니네. 기계화작업은 보기 힘들고 점점 마을이 비여가고 로약자만 남아있는 걸 보면서 저 땅이 어떻게 개간된 땅인데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네.‘김사령원’이 그 골안이라도 이끌어 줄 수 있겠나? "

그리고 저의 군에서의 표현, 식수조림에서의 표현에 대해 긍정하고 치하하고나서 “나는 자네가 촌민들을 꼭 잘 살도록 이끌어 갈수 있을 거라 믿네 ! 결심이 있소?”하시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수장님이 주신 임무를 군인, 대장부의 명의로 꼭 잘 완수하겠습니다!”라고 답복했습니다.

“‘3농'문제는 큰 문제요. 농민이 부유해지지 못하면 초요실현은 공담으로 될 수밖에 없는 거요. 어떻게 하면 농민들을 치부에로 이끌 것이가?”

그러면서 조남기 주석은 저에게〈중화인민공화국 농민전업합작사법〉에 대해 상세히 해석해주셨습니다. 그이는 “<농민전업합작사법>은 ‘3농'문제를 해결하고 농민들의 치부문제를 해결하며 공동히 치부해가는 데 있어서 가장 합리한 방식”이라며 저더러 돌아가 참답게 리해하는 한편 촌민들에게도 터득시켜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선전, 동원으로부터 시작하여 3개월 반만인 2011년 12월 13일, 우리는 사원대회를 열고 석문진대성농업종합개발합작사를 설립했습니다. 대회에서 합작사에 가입한 20여가구가 만장일치로 저를 추대해 저는 합작사의 법인대표에, 리사장직을 겸임하게 되였습니다.

지금은 합작사 가입호는 123가구, 골안 전체 농민을 커버했고 논 150헥타르를 포괄한 경작지가 가입되였으며 전촌의 10여가구 빈곤호도 다 합작사에 받아들인 상황입니다. 3만원, 만원...500원씩 사원들이 도합 10만원을 모아 등록한 합작사의 고정자산은 현재 400만원을 초과하였고 생산 전과정은 기계화를 실현했으며 3년전부터 해마다 주식의 수익금을 20%씩 배당하고 있습니다.

저희 합작사의 기초자금은 조남기 주석께서 조률해주셨습니다. 그이는 연길 거처에서 제가 합작사를 설립했다는 회보를 들으시고 기뻐하시면서 걱정도 앞세우셨습니다. 합작사 명색이 농업종합개발합작사였는데 2012년 8월, 벼이삭이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까지만해도 우리한테는 가공공장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 때문에 조남기 주석은 저를 연길에 두번 불렀습니다. 두번째로 갔을 때 조남기 주석은 50만원을 조률해낸 기쁜 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50만원이 토대가 되여 입쌀가공공장을 앉이는데 수요되는 130만원을 잇따라 해결해 공장 건물도 기계설비도 갖추어 그해로 공장을 가동했습니다.

합작사를 세울 때부터 “합작사 경영을 전통방법으로는 안될 거고 과학적으로 농사짓고 부가가치를 높혀야 하네.” 라고 하신 주석님의 말씀이 귀전에 맴돕니다. 지금 저희 합작사의 입쌀은 적어도 키로그람당 12원씩은 받습니다. 유기농입쌀, 록색입쌀증을 취득한 토대우에서 올해는 최신 량자기술 재배(1헥타르 실험)실험도 하고 있어 본촌, 나아가 주변농민들한테 과학적재배, 과학적 가공 경영 시범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무의 사령, 산의 사령’에 이어 북경, 상해, 광주, 청도...동에 번쩍, 서에 번쩍 판로 개척을 위해 뛰여다니는 저를 보고 이제는 “입쌀 사령”으로 변신했냐며 하시던 주석님의 우스개 말씀이 아직도 귀전에 들려오는듯 합니다....

올해 설을 맞으며 조남기 주석께 전화를 드린 것이 그이와 제가 가진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주석님, 시름놓으십시요. 저는 주석님의 간곡한 부탁을 명기하여 빈곤호 부축에 더욱 진력하겠습니다.

주석님, 고이고이 잠드시오소서!

2018년 6월 21일 학생 김문원 올림.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编辑:김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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