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일

나는 향정부 곁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식당에서 3킬로메터쯤 떨어진 곳에는 30여 가구가 어울려 사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정부에 일보러 올 때면 의례 우리 식당에 들러 끼니를 해결하군 했는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외상을 남기는 일이 잦았다. 집집마다 조금씩 쌓인 외상은 가랑비에 옷 젖듯 어느새 묵직한 장부로 쌓여있었다.
월말이 되여 외상값을 거두러 길을 나섰다. 첫 집에서 겨우 백 원을 받았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마누라가 죽고 형편이 가장 딱한 리사(李四)네 집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학교 저학년쯤 되여 보이는 아이가 학잡비 300원이 없다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리사는 손바닥에 놓인 구겨진 200원을 내보이며 이것이 전부라고 힘없이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먹였다.
차마 외상값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방금 전 첫 집에서 받아온 100원을 리사에게 건넸다. "이걸로 아이 학잡비 보태시고, 외상은 나중에 형편 좋을 때 함께 갚으세요." 리사는 연신 고개를 숙이다가 끝내 눈물을 훔쳤다. 그날 나는 결국 빈손으로 집으로 향했다.
마을 어구 내리막길에서 왕삼을 만났다. 산에서 뱀을 피해 천방지축 달리다가 늪에 빠져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는 그는, 원래 다쳤던 발인데 맨발로 땅을 밟으니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내 신발을 벗어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맨발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큰길로 나서기가 쑥스러워 산등성이 오솔길로 접어 들었다. 자전거를 밀며 걷던 중, 갓난아기 울음처럼 가늘고 애절한 소리가 미풍에 실려 왔다. 풀숲 한가운데, 하얀 털 뭉치 같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산길을 내려왔다.
식당에 도착하니 정전 때문인지 안해가 캄캄한 어둠속에서 투덜대고 있었다. 낡은 집이라 전기 사고는 일상이였다. 수리 기사가 곧 달려왔다. 직원들이 쉬는 뒤칸 작은 방이 문제였다. 수리를 마친 기사가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사장님, 이 배선은 이미 수명이 다했습니다. 당장 갈지 않으면 화재는 시간문제예요." 집주인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소용없었다는 내 말에 기사는 혀를 차며 떠났다.
한편, 새끼 고양이를 본 안해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녀석을 쓰다듬었다. "여보, 이번에 친정 갔을 때 말이예요. 옆집 씨 아저씨가 송아지 태여난 날짜로 로또를 샀는데 1등에 당첨됐대요! 시골에선 큰 동물이 행운이라지만, 도시나 향에서는 이런 작은 생명도 복덩이 아니겠어요?"
그 순간 머리속으로 번개처럼 숫자 하나가 스쳤다. 사선을 넘나들던 이 어린 생명을 구한 시간이 바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나는 고양이를 품에 안았던 그 시간을 정확히 짚어 복권용지에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며칠 뒤, 문득 생각나 인터넷으로 당첨 번호를 대조하다가 나는 하마트면 뒤로 넘어갈번했다. 당첨이였다. 일확천금, 인생 대박.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가슴이 터질 듯 뛰여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지만, 진정되기는커녕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주머니 속의 종이 조각 한 장이 심장을 쿵쿵 두드렸다. 안해가 가계부를 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다음 달엔 애들 학원비도 오르고 세금도 내야 해요. 외상값 좀 어떻게 받아와 봐요." 로또를 만지던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여보, 이제 돈 걱정 안 해도 돼.'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으나 나는 끝내 침을 삼키듯 그 말을 삼켜버렸다.
이 한마디면 아내의 미간은 펴지겠지만, 입 빠른 아내를 통해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것이었다. 그러면 돈 냄새를 맡은 사기군과 도박군, 멀어졌던 친인척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것이다. 당첨금 때문에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는 이웃들의 비극이 눈앞을 스쳤다. 나는 지갑을 꽉 쥐였다. 주머니 속 종이 조각이 웃음이 아닌 불안과 근심의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나는 그 복권을 사무용 책상 세 번째 서랍, 장부 더미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그날 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잡생각에 술을 빌려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잤을까,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상인회장의 다급한 목소리 너머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박 사장! 식당에 불났어! 빨리 나와!"
낡은 배선이 결국 사고를 쳤다. 불길이 잦아든 뒤, 나는 재더미 속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녹아내린 쇠덩이와 검은 재뿐이였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허망함에 나는 일주일을 앓아 누웠다. 그때 안해가 내 거친 손을 잡았다. 화재 보험금과 남은 적금을 탈탈 털어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의 볶음 료리 솜씨랑 내 국밥 손맛은 아직 살아 있잖아요. 우리 다시 시작해요. 이번엔 제대로 된 곳에서요."
우리는 병원과 학교 근처에 쾌적한 식당을 새로 열었다. 재더미 속에서 건져낸 뚝배기를 닦으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요행은 사라졌지만 내 손끝의 감각은 여전했다. 진심을 담아 료리를 하자 식당은 곧 입소문이 났다. 점심시간이면 번호표를 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가게를 확장하고 직원까지 여럿 둔 어느 저녁, 아내가 곁에 앉아 웃으며 말했다. "화재가 나고 나서 당신이 꼭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가끔 생각해요. 그 불길이 액운은 다 태우고, 대신 우리에게 장사 '로또'를 남겨준 게 아닐가 하고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어떤 깨달음이 소름 돋듯이 온몸을 전률케 했다. 내가 그날 리사에게 주었던 100원, 왕삼에게 건넨 신발, 풀숲에서 구한 고양이... 그 모든 '배려심'이 타버린 로또 종이 대신 살아 움직이는 복권이 되여 내게 돌아오지 않았을까?
나는 안해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진정한 복권은 서랍 속에 숨겨둔 비밀번호가 아니라, 세상에 선사한 따뜻한 친절이 돌고 돌아 내 삶을 적시는 과정이였다. 서랍 속에서 타버린 것은 종이 한 장이였지만, 사실 그 불길은 내 마음속의 비겁한 요행심을 태워버린 것이였다. 번호를 고르던 손으로 국자를 들게 했고 당첨을 기다리던 마음으로 손님의 얼굴을 살피게 했다.
"여보, 당신 말이 맞아. 우리는 정말 큰 복권에 당첨된 거야. 다만 그 복권은 긁어서 확인하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정직하게 살아내며 증명하는 거였어."
가게 문 밖, 노을이 지는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내 인생 최고의 당첨 번호는 로또가 아니라 오늘 내 료리를 기다리는 저 사람들의 활짝 핀 얼굴 속에 적혀 있다는 것을...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