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 중경시 유중구에 자리한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 진렬관. /신화넷
관광객이 4월 22일 중경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 진렬관에서 ‘세계 반파쑈전쟁중의 중·한 녀성의 빛’ 사진전을 관람하고 있다. /신화넷
중경시 유중구에 가면 록색 나무들 사이로 푸른 벽돌과 회색 기와로 이뤄진 건물 하나가 보인다. 바로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 진렬관이다.
중경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 진렬관은 중국내 한국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중 최대 규모이다. 이곳은 항전의 포화 속에서 중·한 량국이 함께 싸운 지난 세월을 증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굳건해진 량국간 우정을 보여주는 력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난 1910년 8월, 한일 강제병합이 이뤄지자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중국으로 향했다. 1919년,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되였고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림시정부는 이곳저곳을 떠돌다 최종적으로 중경에 정착했다.
“중경은 한국 림시정부가 중국내 독립운동을 음지에서 양지로 전환시키고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곳이다. 중경 림시정부때는 정치와 군사 체제가 완비되던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중경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 진렬관 책임자 하설은 이곳의 벽돌 하나, 기와 하나가 모두 력사의 산증인이라고 소개했다.
전쟁의 불길이 치솟던 그 시절, 다른 한편으로 중·한 량국은 운명이 얽히고 우정이 뿌리내린 빛나는 순간으로 기억된다.
진렬관 앞에 가면 중문․한글․영문 3개 언어로 ‘대한민국 림시정부’임을 알려주는 표시가 눈에 띈다. 진렬관 내부로 들어서면 한글 〈독립선언문〉과 누렇게 빛바랜 중문 신문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비바람이 몰아쳐도 뜨거운 피로 식을 줄 모르던 그 시절로 이끈다.
그렇기에 이곳은 단순한 문물이 아니라 절절 끓는 력사의 현장으로 평가된다. 진렬관에 전시된 〈중한 호조군사협정〉, 중국공산당 남방국 관련 전보, 1930년대—1940년대 한국 독립운동과 광복군 활동에 관한 《신화일보》 보도 등은 소리없는 감동을 전한다.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한국측은 이 유적지를 복원하고 싶다는 바람을 표명했다. 중경시정부는 문물 유적지 보존과 량국 우호관계를 고려해 한국측과 공동으로 출자해 재개발하기로 예정됐던 유적 소재 구역을 환수하고 원형대로 복원해 진렬관을 건설했다. 이후 1995년 8월 11일 정식으로 개관했다.
“진렬관은 중한 량국 공동의 항전 력사를 깊이 새겼을 뿐만 아니라 한국 력사에 대한 존중이 담겼다.” 책임자 하설의 말이다.
년간 최대 6만명 이상이 찾을 정도로 진렬관 방문객의 수는 적지 않다. 그중 절반 이상은 한국인이다.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 관리에 힘써주신 중경시 관계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옛터를 복원한 중국정부에 감사하고 한중 우정이 한 단계 더 발전하길 바란다.” 방명록에는 감동적인 글귀가 가득하다.
지난 4월 22일, 한국인 류학생 박규민씨는 부모를 모시고 진렬관을 방문했다. “오늘 이곳에 와서 보니 독립의 과정이 쉽지 않았음을 실감했고 중국인의 도움이 컸음을 알게 됐다.” 중국인민대학 신문학과에서 류학중인 박씨는 많은 이들에게 잊혀진 이 시기의 력사를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진렬관은 개관 30주년을 맞아 ‘세계 반파쑈전쟁중의 중한 녀성의 빛’ 사진전, 소장품 전시회, 중한 미식문화교류회 등 기념행사를 잇달아 진행하고 있다.
책임자 하설은 “력사의 파수군이자 더 나아가 우의의 전파자가 되고 싶다.”며 “이 공간을 활용해 력사 속 이야기를 잘 재현하고 중국의 이야기를 잘 들려줌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력사적 기억을 리해하고 중국정부의 포용과 개방의 결심을 알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푸른 벽돌에 새겨진 기억은 여전하다. 이는 단순한 력사를 뛰여넘어 80여년의 세월을 잇는 ‘다리’로 중한 량국 국민의 공동한 기억을 잇고 미래 문화적 공감대와 민심의 융합을 이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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编辑:박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