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물 공급이 하루 끊긴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아마 수도관이 얼어 터진 모양이다.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생수를 주문했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언제든 콸콸 쏟아지던 물이 갑자기 끊기니 막막했다. 우두커니 창가에 섰다. 그런데 아파트 창밖 도시 풍경과는 전혀 다른 옛날 기억이 슬슬 떠올랐다.
“집에 수도만 있어도 발바닥에 털 나겠다.”
어릴 적, 우리 동네 어머니들이 입버릇처럼 늘 되뇌이던 말이다.
1960년대, 우리 집은 옛날 식당으로 쓰던 집을 네 가구가 살도록 개조한 맨 동쪽 자리에 있었다. 여느 집과 달리 우리 집은 아래방과 웃방의 출입문이 모두 동쪽으로 나 있어 문을 열면 바로 연길시의 국자거리가 보였다. 국자가 건너편 중앙소학교의 넓은 운동장 너머로는 멀리 동산이 아득히 보였다. 우리 집 울타리 바로 남쪽에는 배구장 크기만 한 공터가 있었다. 그 공터 한가운데는 동네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용 수도가 있었다.
가을이 되면 동네 집집의 마당마다 하얗게 빨래한 이불 속겉감들이 빨래줄에 걸려 바람에 펄럭이고 배추와 무우가 쌓여 크고 작은 산을 이루었다. 어머니들은 겨우내내 먹을 김장 준비로 남새들을 다듬고 씻어 소금에 절이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부지런히 수도물을 길어 나르고 구정물을 버렸다.
“집에 수도만 있어도 발바닥에 털 나겠다.”
어머니들의 넋두리 속에 다사한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왔다.
겨울철, 악몽 같은 물 긷기에 어머니들은 근심이 깊었다. 공용 수도가 있는 공터는 겨울이면 온통 얼음판으로 변했다. 게다가 수도꼭지 주변에는 작은 얼음산이 생겨 우리 아이들에게는 썰매 타기 좋은 놀이터였다. 하지만 물을 길어야 하는 어른들에게는 미끄러워 힘들었다. 어머니들은 물동이나 물통을 머리에 이고 시집가는 새색시처럼 눈을 살포시 내리깔고 마치 곡예사가 줄타기하듯 조심조심 걸어 다녔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마다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였다.
“욕심 부리지 말고 물동이에 물을 곯게 담으란데……”
겨울이 되면 할머니가 늘 어머니에게 당부하시던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 집 부엌에 모셔진 배불뚝이 물 항아리는 여름에는 물을 다섯 동이 먹여도 배불러 땀을 흘리지만, 겨울에는 물을 일곱 동이 먹여도 어찌할 수 없어 배부른 척했다.
“이 동네 사내들 참, 세계혁명을 혼자 다 하는가 보다. 끌끌.”
할머니가 동네 어머니들을 딱하게 여겨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그 말을 엿들은 건지, 철이 아버지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해마다 직장의 로력모범인 철이 아버지는 동네 골목길도 도맡아 쓸었고 자기 집 물도 열심히 길어 나르군 했다.
어느 날, 눈이 펑펑 내리던 저녁이였다. 늦게 퇴근한 철이 아버지가 욕심스레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지게 량쪽에 달아 메고 걷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철이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의 부축을 받아 병원으로 가게 되였고 하얀 석고 붕대를 감게 되였다. 로력모범이 로동현장도 아닌 집의 물을 긷다 다친 일은 꽤 큰 사고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 이튿날, 간부 한 분이 우리 동네에 와서 집집의 가장들을 우리 집에 불러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그 다음 날 토요일 밤에는 꽁꽁 언 땅에 불을 피워 녹였다. 일요일 아침부터 동네 어른들이 악착같이 곡괭이질을 한 덕분에 마침내 우리 동네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가게 되였다.

“이젠 발바닥에 털 나겠네. 호호호.”
“그러면 발바닥에 털 깎느라 성가셔서 어쩌나. 하하하.”
어머니들은 모두들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물 항아리 밑바닥까지 깨끗이 씻고 닦으셨다. 이제는 물 항아리를 배불리지 않아도 된다면서 코노래까지 흥얼거리셨다. 그런데 홀쭉해진 물 항아리가 이상하게 쓸쓸해 보였다.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이 있었다. 우리 집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나온 지 한참이 지나도 어머니의 하얀 발바닥에는 털이 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하루만 면도하지 않아도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한데 말이다.
“사람의 발바닥에 어떻게 털이 나니? 그냥 호강하려는 욕심에 하는 말이야.”
할머니는 내가 몰래 어머니의 발바닥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모습을 보고 웃으시며 말씀하시였다. 그리고 덧붙이셨다.
“이제 봐라, '집에 하수도가 있으면 진짜 발바닥에 털 난다'고 하지 않나.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욕심이지, 암 그렇고 말고...”
할머니의 예언은 적중했다.
할머니의 말씀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에 하얀 눈이 푹푹 내리던 날이였다. 동네 어머니들이 우리 집에 모여 웃집 누나의 혼수이불을 꾸미며 수다를 떨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하수도 이야기로 넘어갔다.
“집에 하수도가 있으면 정말, 발바닥에 털 나겠다.”
어머니들의 합창이였다.
봄은 용케도 해마다 잊지 않고 우리 동네로 잘 찾아왔다. 이듬해, 뜨락에 살구꽃이 하얗게 피던 해살 좋은 날이였다. 동네 아버지들이 땀을 뻘뻘 흘린 보람으로 집집마다 하수도가 만들어졌다.
나는 어머니에게 바보같다는 타박을 들으면서도, 숙제 검사하듯 어머니의 발바닥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도 어머니의 발바닥에는 티끌만 한 털 한대 보이지 않았다. 동네 다른 집 아이들도 나처럼 같은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예순이 넘은 지금, 가끔 어릴 적 일을 떠올리며 혼자 웃다가 할머니 말씀을 되새겨 본다.
“사람의 발바닥에 어떻게 털이 나니? 그냥 호강하려는 욕심에 하는 말이야...”
“띵동— 띵동—”
주문한 생수가 도착했다. 창밖에 눈은 부슬부슬 계속 내리고 있다. 예전에 우리 마을 공터 공용 수도 자리에 지금은 생수 배달 오토바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목이 말랐다. 생수를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생수가 목을 적시며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공용 수도에서 찬물을 길어 오던 고된 일상은 편리한 현대 생활로 바뀌였고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지고 걷던 삶의 무게는 새로운 배달 써비스로 가벼워졌다.
눈은 여전히 창밖에 쌓여 가고 예전의 고된 삶의 흔적은 희미한 추억으로만 남았다. 어머니들의 발바닥에는 끝내 털이 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사람은 자꾸만 더 갖고 싶어 욕심을 내는지도 모른다.
래일이면 수도물이 다시 잘 나올 것이다. 삶의 지혜를 담은 할머니의 소박한 말씀이 다시금 떠오른다.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욕심이지, 암— 그렇고 말고...”

한길 프로필
1960년 연길에서 출생
시각디자인업에 종사하다가 퇴직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전통문화발전연구회 회원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