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녀

1977년도에 토봉산아래에서 남긴 가족사진
매번 사진첩을 펼쳐들고 가족사진을 볼때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왜 자식 은 이렇게 많이 보고 한평생 고생했을가?"고 원망과 짠함과 그리움에 눈앞이 흐려진다.
중국으로 가면 땅이 넓고 비옥하여 잘 살수있다는 소문을 듣고 1942년 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로는 병약한 부모님을 부축하고 아래로는 두살난 나를 업고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 이도구로 찾아왔다.
소작농으로 근근득식하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여서야 집 한칸, 논 몇마지기를 분배 받았다. 평강벌에서 주로 논농사를 하는 농민들은 겨울이면 벼짚으로 가마니 짜는 부업을 많이 했다.두사람이 호흡을 맞춰가며 한사람은 짚술로 벼짚을 섬기고 한사람은 바두로 내리 치면서 힘들게 가마니를 짰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사람도 힘든 가마니 짜기작업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아버지가 가마니틀 '족답기' (脚踏机)를 만들 기발한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18살 나던 해에 일본으로 가서 6년 동안 방직공장에서 일했는데 그때 터득한 방직기 원리를 리용하여 반복적인 시험과 실패끝에 드디어 족답기를 만들어냈다.
혼자서도 걸상에 앉아 발로 기계를 움직여 바두를 내리치고 한손으로 벼짚을 섬기면 씨실과 날실이 엮이면서 빨리, 많이 짤수있는 실용적이고 선진적인 가마니틀이였다.
아버지가 족답기를 만들었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룡정과 목단강의 목기공장에서 아버지를 청해갔다. 두 공장 모두 아버지를 기술자로 장기 채용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기술만 전수해 주고는 집에 돌아와 평생을 농민으로 살으셨다. 내가 좀 커서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한테 무척 쌀쌀맞게 대했다.
"그때 아버지가 기술자로 취직했더라면 우리도 시내에서 공호로 잘 살았을건데 왜 한뉘 농촌에서 이렇게 궁상떨며 지지리 가난하게 사는 거얘요?"
"너 아직 어려서 뭘 모른다. 나 한사람의 월급으로 어떻게 열식솔이나 먹여 살릴수 있겠냐? 그래도 착실히 농사 짓고 꾸준히 가마니 짜기 부업을 하니 너희들이 배곯치 않고 학교에도 다닐수 있는거란다."
아버지가 족답기를 얼마나 사용가치가 높게 잘 만들었고 가마니를 얼마나 잘 짰는가는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서성공사 체육대회때 가마니짜는 경기종목이 있었는데 제정한 시간내에 다른 선수들이 한두장 짤때 아버지는 그 세배를 짜서 '번개솜씨''가마니귀신'이란 별명까지 부쳐졌다.
50년대 초, 아버지는 과일나무도 심고 집짐승들도 키우면서 다종경영으로 잘살아보겠다는 생각에 학교마을에서 3리 쯤 떨어진 해란강 류역 토봉산기슭에 새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남들은 애들을 공부시키겠다고 시내로 이사가는데 아버지는 산밑 외딴 곳에 집을 짓다니요 ?!" 처음에 나는 이사를 안가겠다고 울며불며 떼질을 썼다.
돈이 없으니 벽돌기와집을 짓지 못하고 토봉산 벼랑아래 돌각담 무지를 치우고 숲속에 초가집을 지었는데 앞벽에 벽돌무늬를 새기고 번듯하게 유리창문도 안장해 놓아 마치 동화속의 예쁜집 같았다. 토봉산에 올라가 노래도 부르고 랑송도 하면서 고운 목청을 틔울수 있어 좋았고 더우기는 서성중학교에 다니는 팔가자와 북대촌 동학들이 늘 들리여 즐거운 휴식터가 되니 점차 그 집에 정이 들고 애착이 갔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9남매 중 맏딸로 태여난 운명을 늘 원망했다. 서성중학교에 다닐 때 학생회 문화오락 부장, 반급 공청단지부 서기로 공부를 잘했지만 아버지는 나를 더는 학교에 다니지 말라고했다. "맏딸이니까 동생들을 돌봐야 엄마가 밭에 나가 일해 공수를 벌수 있다"고 하셨다. 하여 나는 그렇게 가고 싶은 고중과 대학에도 가지 못하고 결국은 사범학교를 가게 되였다.
연길에 가 사범학교를 다니던 첫 학기 겨울의 어느날, 뜻밖에 20원짜리 돈표를 받았다. 1957년도에 농촌에서 20원이면 큰 돈이였다. 마음이 아프고 울컥해났다.
아버지가 아침 일찍 논밭에 나가 일하시고도 밤 늦게까지 또 가마니를 짜고 쪽지게에 산같이 높이 쌓아 짊어지고 공소합작사에 팔아서 모은 돈이였다. 10전어치 빼갈 한잔에 소금 한알로 안주하면서 아껴모은 돈,자식들을 잘 키우기위해 그렇게 뼈 빠지게 일만하신 아버지의 기여와 희생이 느껴졌다.

1959년도에 사범학교를 다닐때 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뒤줄 왼쪽 두번째가 필자임)
갑자기 눈물겨운 66년 전 일이 떠오른다.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화룡방송국 방송원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그 때는 농촌 집집에 유선방송 스피커가 있었는데 저녁에 방송시간이 되면 "우리딸 방송소리요. 우리 맏딸이 화룡방송국의 방송원이 되었소." 하면서 자식에 대한 사랑과 긍지로 무척 즐거워 하시면서 덩실덩실 춤까지 추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정말 다재다능한 분이셨다. 족답기를 만들고 집을 짓고 마을의 공용 상여도 이쁘게 만들었을뿐만아니라 내가 어릴때 깜찍한 새장구를 손수 만들어 주시고 장단 치는 기교도 가르쳐 주시였다. 명절때나 촌민들 오락회때면 직접 새납도 만들어 불었고 "만고강산 유람할제..." 하는 민요가락도 구성지게 부르셨다.
그러고보니 내가 40년전에 <TV꽃봉오리예술단>을 창설하고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끔 인솔할수 있은것도, 팔십 넘은 고령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현재 온라인방송 봉사를 할수 있는것도 모두 아버지의 창의력과 천부적인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늘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던 내가 뒤늦게야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은 아버지사랑과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고 효도하려 했을때 아버지는 그만 뇌출혈로 쓰러져 9년간 병석에 계시다가 1990년도에 세상을 뜨시였다.
불효막심한 이 맏딸은 오늘에야 무릎 꿇고 정중히 참회하는 마음을 억누를길 없다.
아버지! 저를 사람답게 키워주시여 참으로 감사합니다. 아버지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합니다.

김선녀프로필
1941년 한국에서 출생
1961년부터 1997년까지 화룡현방송국,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서 근무.
2019년부터 6년째 우리말 온라인 무료방송 진행중.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