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기활
우리말 속담에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나와 《길림신문》의 인연은 ‘옷깃을 스치는 인연’보다 더 깊게 맺어진 인연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 말을 감히 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1985년 3월에 내가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자 동년 4월 1일에 《길림신문》 창간호가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면서 《연변일보》와 ‘한집식구’로 지내던 《길림신문》이 창간잔치까지 베풀었으니 나의 기자생일과 《길림신문》 생일이 동년동월이라고 나는 자랑했다.
2006년에는 내가 정년퇴직을 하자 《길림신문》이 연변특간인 <연변25시>를 꾸리기를 결정하였고 3월 20일에 나를 <연변25시>에 초빙하면서 나에게 ‘이어지는 기자생활’이 주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길림신문》사에서는 2009년 3월 28일에 나를 《길림신문》 특약평론원으로 초빙한데서 내가 ‘평생기자’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되였다.
2015년에 《길림신문》 창간 30주년을 맞으며 《길림신문》사 편집부에서는 《길림신문》사에 근무하고 있거나 근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묶은 책 《길림신문사 사람들》을 출판하였는데 그 책을 펼치니 ‘시내물이 모여 바다를’ 전문란에 <후반생에 넣은 더 멋진 ‘꼴’>이라는 나의 글이 실렸다. 그외에도 ‘현 계약직원’ 전문란에 나의 이름까지 있었으니 나는 더없는 영광과 자랑으로 감개무량하였다.
필자는 2006년부터 《길림신문》과 ‘한집’ 생활체득을 이런 한마디로 총화한다.
ㅡ나는 한알의 밀씨앗, 《길림신문》은 땅이고 편집기자들은 그 땅에서 밀을 잘 키운 원예사이다.
《길림신문》은 ‘백성신문’
나는 《길림신문》 <연변25시> 창간자의 한사람이다. 내가 2006년 3월 20일에 초빙된후 3월 28일에 <연변25시>가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연변25시>를 꾸리면서 당시 연변특간의 주필인 고 박금룡 주임은 수시로 나와 고 정경락 고문을 불러놓고 <연변25시>의 취지를 토론했고 나중에 <연변25시> 취지를 ‘백성중심, 백성봉사, 백성참여’ 12자로 결정지었다.
나는 박금룡 주임의 한쪽팔이 되여 <독자의견>란을 책임맡았다.
<연변25시>는 흥미있는 다양한 내용들로 전문란을 꾸렸고 120여 편의 독자의견을 싣기도 했다. 그때 신문에 ‘따끔한 의견’을 내놓은 훈춘시 마천자향 오일촌의 리광렬 등 6명에게는 상금을 내주기까지 했다.
<연변25시>는 2008년 3월 25일 100기 출간에 조선문 신문사상 처음으로 통신원들이 직접 기획하고 참여한 <참여25시> 특집면을 꾸리고 6명 통신원을 특약기자로 초빙하여 많은 독자들과 사회의 호평을 받았다.
《길림신문》은 ‘해결사’
몇가지 실례로 《길림신문》의 ‘해결사’를 살펴본다.
2006년 10월 31일 《길림신문》 <연변25시>는 <대학생 영걸이를 살립시다!>는 기사를 첫 시작으로 거리에 나가 프랑카드를 내걸고 모금을 함과 동시에 계속하여 련속보도를 조직하면서 전 사회적인 사랑의 손길을 쟁취하여 영걸이의 병치료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주었다.
2006년 9월 19일 《길림신문》은 <신흥촌 80쌍 경작지를 언제면 돌려주나?>란 톱기사를 실어 왕청현 하마탕향 신흥촌에서 지난세기 70년대에 모 부문에서 징용했던 80헥타르의 경작지를 신흥촌 농민들이 다시 경작할 수 있게 힘써주었다.
《길림신문》의 주선과 도움으로 도문시 석현진 향양촌에서 30년 전에 불법적으로 처리했던 옥토 1.5헥타르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하여 향양촌에서는 편집부에 금기를 증송했다.
도문시 보일러공장에서 수년간이나 해당부문에 신소하던 안건을 《길림신문》이 접수하고 수년간의 구체적인 조사와 련속적인 보도를 통해 변전소를 되찾아 주었는데 공장장이 직접 편집부에 감사신과 금기를 보내오기도 했다.
2006년 4월 25일 《길림신문》은 지난세기 50년대초에 농민들이 농촌생산합작사, 농촌신용합작사, 농촌공소합작사 입사시 입고한 세가지 고금을 두고 <50년대 고금 왜 아직까지 결산해 주지 않는가?>는 내용을 실었다. 그후 계속하여 지상토론을 벌리고 지상토론의 내용을 성 해당부분에 반영하여 답복을 받아냈는바 수십년간 농민들이 갈망하던 문제에 해답을 주었다.
2006년 11월 28일 《길림신문》은 <기념탑 옮겨야만 하는가?>는 톱기사로 도문시정부에서 도문의 쏘련홍군기념탑(백탑)을 옮기려고 자리까지 정한 결정을 바로 잡고 기념탑을 옮기지 않고 새롭게 단장하도록 하였다. 《길림신문》에 실린 기사를 계기로 도문시당위와 정부에서는 3차례나 《길림신문》 기자인 나를 청해 도문건설에 대한 조언을 청취하였다.
이 밖에도 중국조선족들의 한국방문취업을 돕기 위해 《길림신문》에서는 많은 노력과 도움을 주었다.
《길림신문》은 나의 책임감을 담는 ‘그릇’
<연변25시>가 한창 세상에 알려질 때 편집부에서 ‘신문에는 언론이 있어야 한다’고 하기에 나는 신문언론개척으로 매주 한편의 칼럼 <일사일언>을 쓰겠다고 표하고 시종일관 6년간 견지하였다.
나는 내가 시작한 칼럼이 지면 랑비가 아닐가고 우려를 했는데 다행히도 독자들에게 즐겨 읽히는 글이 되여 <일사일언>이 필자의 책임감을 담는 ‘그릇’으로 자리매김했다.
나는 《길림신문》 덕분에 받은 독자들의 사랑, 격려, 기대, 부탁으로 2012년에는 《길림신문》에 발표한 칼럼으로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오기활의 <일사일언>집, 35만자)를 출간하였다.
나는 한국이나 일본에 출국하는 기회에도 《길림신문》 기자라는 신분을 잊지 않았다.
일본에 갔을 때 나는 재일본 조선족 제1세들의 삶의 현장을 취재하느라 아들까지 동원하여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20여명의 류학생을 취재하여 《길림신문》과 중앙인민방송국에서 계렬보도를 진행하였다. 하여 2017년에는 《길림신문》과 중앙인민방송국에서 보도한 재일본 조선족 1세대 삶의 현장 인터뷰로 《왜 갔느냐 일본에, 왜 사느냐 일본에서》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고 일본에서 발행식까지 가졌다.
이밖에도 내가 계렬적으로 《길림신문》에 보도한 오기철, 김수철, 최원, 송해숙 등 주인공들이 국가급 도덕기준병, 가정모범과 연변주 본보기인물로 부상했다.
《길림신문》에서 뛰여다니던 때 나는 ‘동북3성 4대 언론사’와 중앙인민방송국에서 조직한 응모작품활동에 참가하여 최우수상, 동상 등 상을 다섯번이나 수상하기도 했다.
나는 이 모든 영예를 《길림신문》에 돌리며 감사와 보답으로 하루를 살아도 여한이 없이 질적으로 살려고 힘차게 노력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맺는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