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룡운

진달래 만발한 연변의 봄(인터넷 자료사진)
명절들의 불빛과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서 겨울은 끝내 물러난다. 얼어붙었던 땅우로 바람 한 줄기가 스민다. 장백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그 바람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를 스치며, 아직 풀리지 않은 온기를 품은 채 계절의 방향을 조용히 바꾼다. 4월은 그렇게 시작된다.
들판이 먼저 숨을 쉰다. 가지 끝마다 매달린 진달래와 살구꽃 봉오리들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아직 피지 않았으나 이미 봄이다. 만개보다 더 또렷한 것은 터지기 직전의 그 고요한 긴장이다. 봄은 늘 그 문턱에서 가장 선명하다.
문득 묻게 된다. 봄아가씨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가? 먼 길을 달려오는지, 바람 속에 숨어 있는지, 아니면 이미 이 마을 어구에 내려앉아 있는지... 그러나 물음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두만강 양지쪽에서 진달래와 살구꽃보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먼저 고개를 내미는 순간, 답은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천지의 얼음이 풀려 장백폭포로 쏟아진다. 물소리는 겨울을 깨우는 북소리처럼 깊고 길다. 그 울림을 따라 산과 들이 몸을 펴고 오래 웅크렸던 생명들이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온다. 강가에는 아지랑이가 피여 오르고 버드나무 가지마다 연두빛이 번진다.
연길의 부르하통하를 따라 국자교를 건너면 물우로 번지는 빛이 한결 부드러워 진다. 모아산 등산로에는 이른 걸음들이 이어지고 비암산에 오르면 평강벌이 한눈에 풀린다.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이 그 사이에서 겹쳐 흐른다.
그리고 그 우로 생명들이 따라 붙는다. 송아지와 망아지가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강아지는 마당을 가로질러 달린다. 병아리의 작은 울음이 흙냄새 사이로 번진다. 참새들은 낮게 날며 둥지와 하늘을 오가고 제비는 돌아와 처마밑을 맴돈다. 먼 물가에서는 해오라기가 발을 담그고 두루미와 물오리 떼가 하늘과 강을 나누어 가진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제 방향을 알고 움직인다.
농가에는 꽃보다 일이 먼저 온다. 씨앗을 고르고 밭을 갈며 손끝으로 한 해를 연다. 파종을 앞둔 들판에는 말 없는 긴장이 흐른다. 기다림마저 일의 일부가 된다. 단 한 번, 땅을 깊이 적셔 줄 비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계절과 함께 호흡한다.
부르하통하의 얼음은 흔적없이 풀리고 남는 것은 흐름뿐이다. 두만강은 쉼 없이 흐르고 마음도 그 물길을 따라 멀어진다. 물고기 떼가 거슬러 오르듯 보이지 않는 힘이 우를 향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어딘가를 향한다.
한편으로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황소들은 더 이상 밭을 갈지 않는다. 제 몫을 내여주고 살 오른 몸으로 계절을 건넌다.
저 먼 곳에서는 여전히 땅을 파 헤치며 봄 대신 화약 냄새를 키운다 한다. 같은 계절이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그래도 이곳의 봄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려 앉는다. 청명에 산소를 다녀온 뒤 길 떠나는 자식들을 배웅하는 부모의 눈길은 오래 머문다. “추석에 다시 소식 전하마.” 그 짧은 말 하나가 계절을 건너는 다리가 된다. 그리움은 약속 우에 덧쌓이고 희망은 그 우에 놓인다.
멀리 훈춘 방천에 이르면 강과 바다가 만나는 물빛이 달라진다. 이곳의 봄은 그렇게 경계마다 조금씩 다른 얼굴로 이어진다.
4월이 오면 사람도 함께 깨여난다. 겨울의 무게를 털어내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밭으로, 공장으로, 학교로... 아이들의 웃음이 교정을 채우고 멈추었던 소리들이 다시 흐른다. 삶은 멈춘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씨앗이 땅속에 묻힌다. 아무 말도 없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이미 가을을 향하고 있다. 사람들은 안다. 보이지 않아도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봄은 믿음의 계절이다.
아하, 4월이여! 이 땅을 적셔다오. 기쁨을 심고 꽃을 심고 마음까지 함께 심게 하여다오. 삶이 다시 흐르고 그 흐름이 따뜻해지도록...
태양은 소리 없이 다가와 만물의 겨울을 벗긴다. 오래 견딘 것일수록 더 또렷하게 제 색을 드러낸다. 멀리 어떤 세상은 여전히 거칠고 소란스럽다 해도 이곳의 봄은 흔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봄아가씨는 먼 길을 돌아 화려한 곳을 지나치고 이 고향을 먼저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가, 4월의 해빛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결국 자기의 색으로 돌아온다.
2026년 4월1일 초고, 4월7일 수개, 연길 국자교 서재에서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