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1933년 초 일제침략자들은 일본군, 경찰, 위만군, 자위단 등 6000여명의 병력을 출동하고 비행기, 대포까지 투입하여 동만의 여러 항일근거지들에 대해 제1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토벌의 중심은 왕청현 소왕청근거지였다. 2월과 3월에 적들은 소왕청근거지와 그 일대에 덮쳐들었다가 숱한 주검을 남기고 격퇴당했다.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는 중공동만특위와 왕청현위의 소재지로서 지금의 왕청현성에서 동으로 13킬로메터쯤 떨어진 소왕청골안의 뾰족산 동쪽지대에 자리잡고있었다. 서북쪽에 뾰족산이 있고 서남쪽에 북마반산, 동남쪽과 동북쪽엔 또 마반산과 금화령이 솟아올랐는데 2개의 골짜기가 서남에서 동북쪽으로 뻗었다. 게다가 현성인 배초구에서 100리쯤 떨어진 편벽한 산구여서 지리적환경이 매우 좋았다.
4월에 잡아들어 5구 석현에서 일본군과 위만군의 지휘관들이 소왕청근거지를 토벌하고 유격대를 소멸할 군사회의를 한다는 정보가 근거지에 전해졌다. 현위서기 리용국, 현위 군사부장 김명균, 유격대 대대장 량성룡 등은 함께 회의를 열고 방어대책을 강구하였다.
회의에서는 적들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제하에서 정면으로 막아나서는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더 깊은 산으로 피하는가 하는 두가지 의견이 제기되면서 근거지안에 비록 1중대와 2중대의 60여명 유격대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유격대의 사기가 높은데다가 유리한 자연지리조건을 갖고있고 기동령활한 유격전술을 쓴다면 적들을 얼마든지 타승할수 있다고 보았다. 회의는 정면공격주장을 통과하고 군사부장 김명균이 직접 한개 중대를 이끌고 가야하에 가서 결사대를 무어 회의장소를 풍비박산내도록 결정하였다.
김명균은 소속중대를 지휘하여 적 지휘관들의 회의장소에 은밀히 숨어들었다. 결사대는 감쪽같이 보초놈을 재껴버리고 회의장소로 돌입하였다. 한 대원이 선참 들어가서 꼼짝말라고 소리치니 적 지휘관 놈들은 어인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하였다. 찰나 한놈이 총질한데서 회의장소에 뛰여든 대원은 불행히 희생되였다.
적들이 반격하는데서 결사대는 급급히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은 하루종일 적들을 달고다니며 족치다가 영창동에 가서 여러날 피어린 전투를 벌리였다. 나중에 탄알이 떨어지고 수류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결사대가 최후를 각오할 때 중대장 장룡산이 후원군을 데리고 와서 적들의 포위를 헤치였다.
4월 17일 아침 1500여명의 적'토벌대'가 물밀듯이 소왕청근거지에 덮쳐들었다. 전투지휘부는 소왕청골짜기어구와 오른쪽 쟈피거우 방향, 왼쪽 대왕청골이 환히 보이는 가파로운 고지에 설치되였다. 여러 망원초의 연기와 수기신호를 통하여 지휘부는 적들이 왕청거리를 쓸어나왔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내고 뾰족산과 쟈피거우, 마반산에 매복진을 펼치였다.
오전 10시경에 적들은 전연방어진지인 뾰족산에 덮치였다. 대기하고있던 1중대 1소대의 대원들은 적들이 30∼40메터 가까이 접근할 때 일시에 사격하여 적의 선두부대 20여명을 쓸어눕히였다. 적들은 산밑 강가로 퇴각하였다가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뾰족산 남쪽고지와 서쪽으로 짓쳐 올라왔다.
유격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적들이 아군진지에서 서성거릴 때 제2방어선의 유격대원들과 반일자위대들이 명중탄을 퍼부었다. 일본수비대 10여명이 또 번드러졌다. 반일자위대는 포복전진으로 올라오는 놈들에게 돌벼락을 안기였다. 적들은 황급히 왕청쪽으로 꽁무니를 뺐다.
이튿날 아침 적'토벌대' 1000여명은 대포의 엄호하에 소왕청골짜기와 쟈피거우, 대왕청골짜기 3면으로 일시에 쳐들어왔다. 대왕청골짜기의 적들은 기병과 합세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적들이 기고만장하여 마촌쪽으로 뾰족산에 오르니 진지는 텅텅 비였다.
이곳을 지켜선 1중대 1소대는 진지를 에돌아 마촌과 서대파사이의 고개를 넘어가 마촌을 바라고 달려드는 일본수비대 한개 중대를 기습하여 무리죽음을 안기였다. 왕청골짜기로 달려든 적들도 마반산에서 2중대의 매복습격을 받아 쩔쩔매다가 왕청쪽으로 달아나고말았다.
이날 점심에 적들은 비행기와 대포, 기관총의 엄호하에 마촌을 거쳐 아군지휘부가 있는 715고지를 맹공격하였다. 1중대 2소대와 3소대는 산비탈 전호속에서 적의 거듭되는 공격을 수차 격퇴하였다. 밤에 적들은 대방자쪽으로 물러가 야외숙영을 하였다. 지휘부에서는 야간습격조를 파견하여 재차 무리죽음을 안기게 하였다.
피어린 방어전은 3일째 계속되였다. 근거지의 군민들 저저마다가 한사람같이 근거지방어전에 떨쳐나섰다. 후방을 지켜선 녀성들은 불비속을 헤치면서 물과 밥을 진지에 날라갔고 아동단원들은 근거지를 지켜선 유격대아저씨들에게 항일가요를 불러주며 그들의 투지를 고무하여주었다. 한데서 19일 아침 일본군과 위만군 련합'토벌대' 수백명이 왕청을 떠나 대감자 북고령을 에돌아 소왕청골짜기에 기여들었다가 일본군기병대 20여명이 유격대 2중대 1소대에 의해 졸지에 녹아났다. 2중대 2소대는 산기슭에 매복해있다가 일본군보병중대를 답새겼다. 반일자위대는 증원을 서둘던 위만군 지휘관 몇놈을 거꾸러뜨렸다. 일본군장교가 군도를 빼여들고 '도쯔께끼'를 부르다가 역시 꺼꾸러졌다. 일본군과 위만군은 재돌격을 시도했으나 수류탄은 연해연방 적진에 날아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들은 청구자령 방향으로 꽁무니를 뺐다.
이날 적들은 쟈피거우 쪽으로 우회하여 마촌에 기여들었다. 다른 한 '토벌대'가 또 마촌에 접근하고있었다. 1중대 3소대는 이놈들에게 한바탕 총질하고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먼저 마촌에 기여든 놈들은 선손을 쓴다며 뒤미처 접어드는 제편 부대에 불질하였다. 진짜 개싸움이 벌어졌다. 적들이 진상을 알았을 때는 이미 두시간이나 개싸움을 한 뒤였다.
며칠후 왕청주둔 일제수비대 100여명이 앙갚음을 한다며 마촌을 바라고 가만히 기여들다가 뾰족산을 지켜선 초소의 몇명 반일자위대원에게 발각되였다. 사정이 급했다. 근거지 본부에 알릴 시간이 없었다. 반일자위대원들은 선손을 써서 불의사격을 가했다. 얼이 나간 일제수비대는 우리측의 무력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급급히 줄행랑을 놓았다.
김명균, 량성룡 등이 지휘한 소왕청방어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적 '토벌대' 1500여명은 산등성이와 골짜기마다에서 갈팡질팡 사흘을 허둥대다가 400여명의 주검을 내고 끝내 패주하고말았다. 소왕청근거지를 비롯한 연변 여러 근거지들에 대한 적들의 제1차 대'토벌'은 수치스런 실패를 면치 못하였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