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吉林朝鲜文报-吉林省委朝鲜文机关报
● 国内统一刊号: CN22-0030 邮发代号: 11-13
길림신문 > 문화문학

‘28명렬사순난지’에서 조기석렬사를 만나다

안상근      발표시간: 2025-09-09 15:33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28명렬사순난지’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쑈전쟁승리 80주년을 기념하여 당중앙과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퇴역군인사무부에서 최근 제4진의 43명 저명한 항일영렬 및 영웅단체 명부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중공연길구위 서기였던 조기석(1904-1932)렬사의 이름도 들어있어 그의 희생과 공헌이 국가적으로 다시 한번 높이 평가받게 되였다.

“이 소식을 신문에서 본 순간, 조기석렬사를 비롯한 28명 순난렬사들의 희생도 당과 국가에서 결코 잊지 않고 긍정해주는구나 싶은 생각에 큰 위안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연길로인뢰봉반 반장인 박철원선생의 솔직한 고백이였다.

요즘 먹자거리로 번화해지고 유명해진 연길시 발전의 연집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다가 실현촌에 이르면 길서쪽 밭가운데에 낮다란 봉분과 함께 ‘28명렬사순난지’라고 쓴 화강암비석을 만날수있다. 

“이 곳에 조기석렬사를 비롯한 항일렬사 28명이 묻혀있습니다”박철원선생은 해마다 청명절과 추석이면 이 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연길로인뢰봉반의 주도로 렬사들의 영령에 조의를 표하고 자라나는 새세대들에게 애국주의 혁명교양을 진행해온 세월도 어언 18년 세월을 잡는다고 소개했다.

28명렬사순난지에 대해 소개하고있는 연길로인뢰봉반 반장 박철원선생

“‘28명렬사순난지’비석의 높이는 3.2메터인데 이는 참사가 발생한 1932년도를 의미하며 비석테두리 앞면과 뒤면에 각각10송이, 량옆면에 각각 4송이의 진달래꽃을 새겼는데 이는 28명의 렬사를 상징함과 동시에 조기석렬사가 사망당시 28세였음도 상징합니다. 대리석 밑받침은 인민대중의 옹호를 표시하고 비석머리의 홰불설계는 춘황추수투쟁의 거세찬 불길을 뜻합니다”박철원선생은 매번 이곳을 찾은 사람들앞에서 우선 비석에 깃든 이야기부터 꼼꼼히 소개한다. 

‘28명렬사순난지’비석은 중공연길시위와 연길시인민정부에서 지난 1999년11월7일에 세웠는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932년 봄 중공동만특위 선전부장 겸 중공연길구위서기인 조기석은 공산당원과 광범한 군중들을 조직령도하여 춘황투쟁을 펼치였는데 일제침략자와 봉건세력들을 유력하게 타격하였다. 1932년 4월27일 조기석 등 28명 렬사들은 이곳에서 영용하게 순직하였다.”

비석 뒤면에는 조기석을 비롯한 17명의 순난혁명렬사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나머지 10여명 렬사들의 이름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못하여 올리지 못한 형편이라고 박철원선생은 해석했다. 혁명사업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지만 아직도 어느한 심산속에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이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이름이 확인된 렬사명단중에는 유종화와 그의 두 아들인 유태봉, 유태선, 리병필과 그의 두 아들들인 리학산, 리학진 등 일가족 부자이름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가족성원들이 항일구국의 길에서 모두 순직하여 안타까움과 경건한 숭모의 마음을 억누룰수 없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85년 4월에 출판한《장백의 투사들》2의 <연변항일렬사전>에 따르면 중공연길구위서기 조기석렬사는 1904년생인데 ‘공산주의사상의 온상’으로 불리운 동흥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어려서부터 반일애국의 뜻을 키웠다. 1926년도에 그는 황포군관학교 교도대에 들어가서 군사학을 배웠으며 1928년에 연변에 돌아와 항일혁명투쟁의 불길속에 뛰여들었다.

1930년 5월 연변각지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성세호대한 ‘붉은5월 투쟁’을 진행하였는데 조기석은 군중들을 령솔하여 지주와 악패 한간들을 습격처형하고 창고의 식량과 재물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30년 여름, 조기석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1년에 중공연길구위서기로 임명되였다. 조기석은 개인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놈들의 피비린 탄압과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체포와 감금도 념두에 두지 않고 농촌들에 내려가 기층당지부를 조직하고 광범한 군중들을 반일투쟁의 렬화속에 뛰여들게 하였다. 혁명의 거세찬 불길에 질겁한 일제와 그 주구놈들은 미친듯한 대검거를 실행하면서 수많은 혁명자들을 체포하여 연길감옥에 구금하였는데 중공동만특별위원회에서는 연길감옥에 구급된 혁명동지들을 구원하기 위한 간고한 사업을 연길구위에 하달했고 조기석은 옥중동지들의 탈옥을 밖에서 도와나서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2년 봄, 중공동만특별위원회에서는‘일본침략자를 몰아내자’‘주구를 타도하자’‘주구의 식량을 빼앗아 기황을 해결하자’는 투쟁구호를 제기하고 춘황투쟁을 발동하였는데 당의 호소에 향응하여 동만 각지의 농촌들에서는 성세호대하게 주구청산을 결합한 춘황투쟁에 궐기해 나섰다. 조기석은 연길구산하의 수백명 농민들을 지도하여 마반산 오암동에서 주구청산대회를 열었는데 대회에서 5명 주구의 죄악을 폭로하고 청산하였으며 대회후 주구와 반동지주의 식량을 빼앗아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에서 호된 타격을 받은 일본참략자들은 1932년부터 시작하여 경찰과 위만군경을 동원하여 동만에서 인민들에 대한 대량적인 토벌과 살륙을 감행하였는데 닥치는 대로 붙잡아 가두고 학살하였으며 수많은 농촌마을들을 불태워 재더미로 만들었다. 연길구에서도 춘황투쟁후 주구가정의 밀고와 더불어 검거풍이 일어났는데 일본경찰서와 위만경찰서 적들은 북산촌에 덮쳐들어 회의를 하고있던 조기석 등 20여명의 동지들을 체포하였다.

일제와 괴뢰군들은 조기석을 비롯한 항일지사들을 체포하고 갖은 고문과 회유를 하였지만 실패하게 되자 이곳에 끌고와서 초가집에 몰아 넣은후 기관총사격을 하고 불을 질러 살해하였다. 이튿날 놈들이 사라지자 군중들은 재더미를 헤쳐가며 혁명렬사들의 유골을 모아 합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28명렬사순난지’이다.

“오늘날 우리의 행복한 생활이 어떻게 왔는가를 우리는 반드시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배불리 잘 먹고 근심없이 잘 살고있고 생활형편이 펴인 것은 모두 조기석렬사와 같은 허다한 항일렬사들의 희생이 있었기때문입니다. ‘물마실때 우물판이를 잊으면 안되는 것’처럼 우리는 절대 우리의 오늘날 행복을 위해 목숨바쳐 싸운 항일렬사들을 잊으면 안됩니다.” 

박철원 선생은 ‘28명렬사순난지’가 비장한 항일 이야기가 서린 유서 깊은 애국주의 교육 현장임에도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조기석 렬사가 국가 항일 명장 명단에 오른 것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하는 이 장소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잘 보존하며, 항일에 몸바친 혁명 선렬들의 빛나는 영웅사적을 길이길이 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28명렬사순난지’는  단순한 비석과 묘지가 아니라, 일제의 침략에 맞서 목숨으로 독립과 자유를 외쳤던 이들의 넋이 서린 현장이다. 우리는 이곳을 통해 력사의 무게를 느끼고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선렬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계승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일깨우게 된다.

/안상근 김파기자


编辑:김가혜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