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촌당성교육기지.
연길에서 100여킬로메터 떨어진 왕청현 대흥구진 홍일촌은 1930년대 초, 중공왕청현위와 하마탕구위의 소재지로서 김상화, 김은식, 김백문 등 혁명영렬들이 용솟음쳐 나온 곳이다.
홍일촌은 홍색관광을 특색으로 하는 행정촌으로 2020년 6월에 길림성 성급향촌관광중점촌에 입선되였으며 그해 7월에는 전국향촌관광중점촌과 전국 60개 홍색관광 발전 전형사례 명단에 들었다. 2020년에 접대한 관광객이 3.2만인차에 달하면서 인기가 상승하였으며 2022년에 길림성홍색관광시범촌으로, 2021년에 국가 '당창건 백주년 홍색관광 백갈래 정품코스'로, 2024년에는 이 촌에서 건설한 홍일촌당성교양기지가 국가급홍색관광정품코스에 이름을 올렸다.
홍일촌당성교양관에 전시된 김상화렬사의 반신상.
2018년에 건설한 당성교양기지는 부지면적이 12.3무인데 500여폭의 력사도편과 동상, 조각물로 근거지의 건설사와 영웅인물형상을 부각시킨 '당성교양관', 200여건의 항일전쟁시기 문물과 농경기구, 수백폭의 사진으로 홍일촌의 발전사를 보여준 '촌사교양관', 항일련군 녀전사의 생애와 가정사를 보여주는 '김백문옛집' 등 부대시설이 포함되여 하나의 완정한 홍색문화 전승기지로 거듭나고 있다.
홍일촌 촌사교육관에 전시된 집단부락 모형.
홍일촌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바로 김상화이다. 1900년 2월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후동촌의 한 빈고농의 가정에서 출생한 김상화는 10살 나던 해에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생활난으로 학교를 얼마 다니지 못하였다. 1924년에 왕청현 하마탕에 이사해간 김상화는 당지의 진보적인 청년들과 함께 반제반봉건 혁명활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사상각오가 신속히 제고되였다. 그의 영향하에 그의 안해, 어머니, 동생들이 선후로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1930년 5월 김상화는 ‘붉은 5월’ 투쟁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7월에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0년 하순,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왕경(문벽도)은 룡반구에서 왕청현 제1차 당원대회를 소집하고 김훈을 서기로 하는 중공왕청현위를 건립하였다. 그때 전 현의 당원수는 147명이였는데 김상화는 하마탕구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1931년 1월 21일, 중공왕청현위 제1임서기 김훈(1904-1934)이 체포되자 1931년 1월 27일, 중공동만특위에서는 김상화를 왕청현위서기로 임명하였다. 현위서기로 임명된지 닷새만인 2월 1일 저녁 김상화는 적위대의 무장력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북하마탕 대방산촌(지금의 홍일촌)에 내려와서 북하마탕 지부서기 한영호를 만나 밤 늦도록 무장탈취와 근거지건설에 대해 연구토론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 600여명의 '토벌대'가 갑작스레 마을을 덮쳤다. 밀정의 보고를 받은 놈들은 한집한집 샅샅이 뒤졌고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천정에 숨었던 김상화와 한영호는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김상화렬사 희생지 안내비와 비술나무.
적들은 그가 사발속에 감추어둔 문건과 소구유아래에 감추어둔 다섯 자루의 권총을 들추어내고 한영호가 바친 12자루의 총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며 혹형을 들이댔다. 입과 코에 고추물을 부어넣고 손가락에 참대꼬챙이를 꽂아 몇차례 까무러쳤지만 김상화는 이를 악물고 당의 비밀을 고수하였다.
그날 저녁 김상화는 적들의 더욱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혼미상태에서 당과 조직의 기밀을 루설할 것이 근심되여 한영호와 더불어 자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저녁 한영호는 김상화가 넘겨주는 면도칼날로 자기의 목을 그어 자진했고 김상화도 면도칼로 자기의 목을 힘껏 그었다.
이튿날 아침, 적들은 한영호는 이미 사망하고 김상화는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김상화는 손으로 필묵을 가져오라고 시늉했다. 그는 종이에 “나와 한영호는 공산당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고한 백성들이니 그들을 풀어주기 바란다. 혁명은 꼭 성공할 것이다!”라고 힘있게 썼다.
1931년 2월 5일, 적들은 그 어떤 혹형과 유혹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김상화를 사방산아래에 끌고 가서 총살하였다. 그때 김상화의 나이는 31살이였다.
김상화렬사릉원 전경.
김상화가 희생된 후 잔인하기 짝이 없는 적들은 군중들을 위협하기 위하여 작두로 김상화와 한영호의 목을 잘라 머리를 마대에 넣고 마을을 한바퀴 돈 다음 마을 중심거리의 큰 비술나무에 걸어놓고 효시하였다.
그가 희생된 후 하마탕 일대의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창작한 “...다섯이라면 오호사해 다 함께 노래하네, 왕청현위 서기 김상화를, 여섯이라면 6월에 2를 곱해 12월이라네, 렬사의 피는 강이 되여 흐르고…”라는 (김상화)<십진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휘뿌리며 렬사를 추모하였다고 한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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