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새 학기만 되면 각종 문구를 준비하듯 고대에 공부하는 서생들 역시 학업에 필수적인 문구를 갖추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붓, 먹, 종이, 벼루로 대표되는 ‘문방사보’는 그들에게 오늘날의 필기구보다 더 소중한 학습 도구였다. 시대를 막론하고 배움을 시작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문방사보》(文房四谱)에는 ‘네 가지 보물 중 벼루가 으뜸이다’라고 기록되여 있는데 벼루의 핵심적인 지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먹을 갈아 먹물을 내는 도구인 벼루는 옛사람들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빠질 수 없는 ‘문구 파트너’였다.
최초의 벼루는 단지 갈아서 평평하게 만든 석기에 불과했지만 한(汉)나라에 이르러 조각된 돌 뚜껑이 추가되고 안정적인 받침대가 생겼다. 위진(魏晋)부터 수(隋)나라까지 원형 도자기 벼루가 등장했으며 세개의 받침대에서 여러개의 받침대로 바뀌여 생동감을 더했다. 기형(箕形) 벼루는 당(唐)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키(簸箕) 모양을 띠고 있으며 벼루 바닥 한쪽은 땅에 닿고 한쪽은 받침대로 지탱한다. 당과 송나라 때에 이르러 벼루의 형태는 더욱 다양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벼루는 단순한 문구를 넘어 책상우의 예술품이 되였고 귀족과 문인, 묵객들이 품격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였다.
료(辽)나라 인물 이야기 삼채유도 벼루
쌍료시 정가툰박물관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긴 ‘문구’가 소장되여 있다. 바로 료(辽)나라 인물 이야기 삼채유도 벼루이다. 전체 높이는 9.5센치메터, 구경과 바닥 지름은 모두 18.4센치메터이며 팔각형의 직벽통(直壁筒) 형태의 받침이 있어 매우 정연하다. 몸체에는 노랑과 초록 유약 색상이 어우러져 있고 네개의 초록 유약 사각형과 네개의 노랑 유약 사각형이 교차로 배렬되여 있다. 가장 절묘한 점은 각 사각형 테두리마다 ‘벌로 고기를 먹이다’(罚人吃肉)는 인물 이야기가 돋을 새김되여 있는데 인물의 자세도 여전히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
아마도 천년전 한 소년이 그것을 들고 자신의 구학의 길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문화재는 박물관의 소중한 문물일 뿐만 아니라 료나라 문화와 생활을 연구하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중국길림넷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