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吉林朝鲜文报-吉林省委朝鲜文机关报
● 国内统一刊号: CN22-0030 邮发代号: 11-13
길림신문 > 문화문학

​한국 서울 대림동에서 만난 연변 인기가수 김청

유경봉      발표시간: 2024-09-20 16:18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찜통 무더위가 연속되던 어느 여름날, 대림동 6번 출구에 있는 연변 가수 김청(1966.07.20.) 쮸바(酒吧)에서 주인장 김청을 만났다.


재한 중국조선족 중국 국가 1급 가수 김청

2018년 인사동에서 열렸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조선족 민요 가수 김청 초청 콘서트>에서 인연이 되어 만났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서구식 외모를 가진 김청은 청 푸른색의 단아한 옷차림이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며 더 성숙한 여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쮸바 홀 한 켠에는 주한중국대사관 싱하이밍 대사, 한국 외교부 장관 박진, 주현미 가수 등과 김청 가수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기자의 인터뷰를 받고 있는 김청 가수(왼쪽)

“국가 1급 가수가 어이하여 여기 대림동에 왕림했을까요?” 나의 농담에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고생문을 열려고 온 거죠 뭐.” 십여 년 전에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잔뜩 주눅 들어 있었던 때와는 달리 그녀는 아주 당찬 모습이었다. 이런저런 연변 소식을 전하다가 손님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하자 우리는 인터뷰를 시작했다.

기자: 어떻게 되어 대림동에 쮸바를 열게 되었나요?

김청: 연길시 조선족 예술단에서 부단장 겸 MC로 30년을 일하다가 앞당겨 퇴직하고 한국에 나왔습니다. 한국에 나온 지는 2년 정도 되었구요. 이 업을 시작한 지는 8개월 정도 되었어요. 지금까지 내가 중국에서 쌓았던 스펙으로 한국에서 한번 멋지게 도전해 보려고 나의 이름을 걸고 쮸바를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인맥을 이용해서 고향에 대한 중국조선족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한편 돈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저를 믿고 찾아오는 중국조선족들에게 민요나 연변노래를 불러주면 그들은 춤까지 추면서 여기에서 맘껏 즐기곤 합니다. 우리 쮸바는 대림동의 연변이나 다름 없습니다.

기자: 가수로 성공하는 과정에 고마운 스승이 있다면 어떤 분들이 있을까요?

김청: 초중 시절에 연변예술학교의 전화자 선생의 지도를 받고자 화룡과 연길을 어린 나이에 혼자 버스로 왕래하며 민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려채옥 선생으로부터 벨칸토 창법을 전수해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으며 현재는 한국의 유명한 작곡가인 공정식(“부초 같은 인생”의 작사, 작곡가) 선생을 모시고 일주일에 두 번 트로트를 배우고 있습니다. 트로트는 비록 나의 전공이 아니지만 이 역시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명 작곡가 공정식(왼쪽)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있는 김청 가수 

기자: 자신의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합니까?

김청: 2000년도에 북경 중앙방송학원과 북경 중앙음악학원에서 각기 반년씩 연수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성악도 배우고 사회자로서의 기초를 닦게 되었습니다. 1992년 연길시 조선족 예술단에서 프로 사회자를 뽑았을 때 저는 중국어와 조선어에 능통한 한편 중국민요, 조선 민요도 잘 부르다 보니 사회자로 발탁이 되었고 그 후 가수로도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저는 사회자와 가수라는 양 날개를 가지고 연변의 문화예술계를 누비게 되었으며 점차 예술단의 중견배우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가수와 사회자로 활약하고 있는 김청 가수 

저의 전성기는 2000년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성황리에 펼쳐졌던 2000년 제1회 중국 조선족 민속관광박람회와 2002년 최대명절인 연변조선족자치주 50주년 기념대회의 사회자가 되어 연변을 전국에 알리는데 한 몫을 하게 되었으며 사회자로서의 화려한 자리매김을 하여 관객들로부터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았지요.

인산인해를 이룬 관람객들 앞에서 중앙과 성, 주와 시 지도자들의 연설을 중국어와 조선어로 즉석 통역하면서 대회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 올렸으며, 그로부터 저도 일약 연예계의 인기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지요. 그걸 계기로 한국의 KBS 가요무대에도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저에게는 “연변의 꾀꼬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기자: 연변에서 국가 1급 배우이자 가수인 김청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어떤 상들을 받으셨는지요?

김청: 2002년 길림성 청년 가수 노래 콩클에서 《장백의 정가》로 금상, 2003년 전국 조선족 청년 가수 성악 콩클대회에서 은상, 2007년 9월 22일 2007 중국 애심건강대시콩클 대회 중국 최우수 자태상, 그 외에도 <연길시 모범 가수>, <선진 개인>, <전국 3.8 홍기수> 칭호와 영예를 받았습니다. 20여 년간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로도 활약하였으며, 그중 2년간은 《우수인민대표》의 영예까지 얻었습니다.

20여년간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로 활약한 김청 가수

기자: 북한(조선)과 인연이 되어 음반도 여러 개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김청: 2003년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제에 참가했을 때 저는 조선의 선진적인 설비가 갖춰지고 우수한 악사들이 있는 영화 방송악단에서 개인 음반을 내고 싶은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선 측과의 면담에 성공하고 귀국한 후 작사자와 작곡가 선생님들을 발이 닳도록 찾아다니면서 새 곡을 써 달라고 청 들었습니다. 저의 끈질긴 노력으로 끝내 14수의 가사에 곡이 붙게 되었으며 5월 14일 노래를 받아 쥐고 조선으로 바로 나갔습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나간 지 3일 만에 편곡을 끝내고 악대와 겨우 한 번 정도 맞춰본 후 즉각 녹음에 들어갔지만 뛰어난 노래 실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악사 선생님들은 노래 한 수가 녹음될 때마다 저와 함께 들어본 후 《김청 선생은 인물도 곱지만 노래를 잘 불러 더 곱습니다.》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친선 예술제에서 <천하절승 묘향산>을 불러 금상을 수여하고 2004년 <바다의 노래>, 2006년 <모란봉>, 2007년 <조선아, 다시 안아보자>로 연속 금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특히 이 해 북한 노래 14수를 받아 음반을 냈고 7월에는 장백산 천지와 고산 화원을 배경으로 한 음악 DVD를 제작해 출시하였습니다. 

2006년 <연변 아리랑>, 2008년 <나와 같은 친구>, 중국어판 <장백 사나이> 음반을 출판하였는데 대표적인 노래는 “자주자주 가보세요” “어머니 눈물” “진달래” 등이 있습니다.

기자: 앞으로 한국에 정착할 생각인가요?

김청: 예술이란 한 우물만 파던 내가 연예인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한국에서 자영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날 제가 손님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 것이 몇 번이나 되나 해서 세어 보았더니 82번이나 되었습니다. 때로는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자책할 때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받는 퇴직금으로도 생활에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이런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있냐는 주위의 권유도 있지만 아직은 손 놓고 놀고 싶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여 뭔가를 이루어 내겠다는 도전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자: 한국에서 각종 행사에 초대되어 출연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청: 재한동포 여러 단체의 각종 행사에 초대를 받아 출연을 했습니다. 그 외에도 2023년 중국주재 한국대사관의 요청으로 “추석맞이, 국경절 축하”행사와 2024년 재한화교화인 춘절맞이 초대회 행사에도 참가하여 공연을 펼쳤습니다. 

2024년재한화교화인춘절맞이초대회에서  (전)중국주한대사 씽하이민(왼쪽) 대사와 김청 가수

기자: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요?

김청: 저는 과거에 연변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사랑에 꼭 보답하겠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현재 나를 믿고 대림동 가게를 찾아주는 중국동포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지 생활이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나는 변함없는 마음으로 중국동포들을 위해 노래를 부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과 함께 공연을 다니면서 나의 재능을 맘껏 발휘해서 한국에 정착하는데 성공하려고 합니다.

서울 대림동 “연변가수 김청 쮸바” 주인장 김청 가수

중국에서 이루었던 화려한 커리어를 내려놓고 한국에서 새롭게 자신의 꿈을 펼쳐가고 있는 김청 가수의 아름다운 내일을 축복하면서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한국어 표기법을 그대로 두었으니 량해 바랍니다.]

/길림신문 해외판 박연희 기자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