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림순자

그림 AI생성
아련한 기억의 물결을 따라 반세기를 훌쩍 넘긴 세월 저편을 바라보노라면 한 분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른다. 내 생애에서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웠던 천사 같던 분이다. 이미 오래전에 하늘나라로 떠나셔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지지만 이제라도 진심으로 그분의 아름다운 령혼을 기리고 내 삶을 밝혀 주었던 그 사랑을 전하고 싶다.
지난세기 60년대말 판사였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우리 집안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신장질환으로 자리에 누워 꼼짝할 수 없게 되였다. 열세 살 큰언니가 어머니 역할을 맡아 살림을 꾸렸고 열 살이던 나는 아버지 몫을 대신해야 했다. 언니가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면 나는불을 때고 물을 긷고 어머니의 약을 달였다. 병약한 언니 대신 힘든 일은 대부분 내 차지였다.
가장 큰 문제는 겨울철 난방이였다. 집이 추우면 어머니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였지만 어려웠던 가정형편상 석탄을 넉넉히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동네 두부공장에서 버린 재더미를 뒤져서 콕스를 주워 오는 일이였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두부공장으로 향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재더미를 뒤져 한소쿠리씩 콕스를 주어 오군 했다. 갈라진 손으로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콕스를 줏기란 아직 어린 아이한테는 너무 힘든 고역이였다. 하지만 가난은 나를 일찍 철들게 했고 선택의 여지를주지 않았다. 하여 단 한 번도 콕스 줏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매일같이 나오는 나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두부공장 아주머니가 궁금한 듯 내게 다가와 사정을 물으셨다. 집안 형편과 어머니의 병환 이야기를 들으신 그 분은 한참 말없이 서 계시다가 갑자기 이글거리는 불을 큰 삽으로 퍼내 물을 끼얹어 주셨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얼른 담아 가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 아주머니는 내가 나타날 때마다 타다 남은 콕스를 일부러 재더미에 뿌려 두셨다. 덕분에 나는 훨씬 수월하게 한 소쿠리씩 콕스를 채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부를 만들고 남은 콩비지를 얼려 두었다가 가끔씩 쥐여 주시며 집에 가 끓여 먹으라고 하셨다. 모두가 식량난에 허덕이던 시절 그 나눔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콩비지를 끓여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던 날이면 허기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우리 가족에게 아주머니의 손길은 한 줄기 빛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얼어붙었던 내 마음에도 온기가 스며들었다.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애로운 눈빛, 서로 돕는 미덕, 그리고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라는 희망이 싹텄다.
그분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랑을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았다. 지금도 어려운 이웃을 보면 외면하지 못하는 리유는 어린 시절 내 손을 잡아 주던 그분의 따뜻함이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힘들고 서글픈 기억이지만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행운아라 여긴다. 천사 같은 한 분의 도움 덕분에 우리는 역경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그 아주머니의 사랑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소박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인간애였다.
감동적인 드라마나 책을 접할 때면 가슴이 벅차오르며 그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삶에 이어진 사랑의 릴레이는 바로 그분에게서 시작되였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이 글로써 그때 말로 다 하지 못했던 깊은 감사의 마음과 당신의 사랑이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또 다른 온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다.
사랑은 기억되는 순간 이미 영원이 된다. 그분은 내게 불씨 하나를 건네주셨고 그 불씨는 지금도 내 안에서 꺼지지 않은 채 수많은 겨울을 지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겨울을 녹여준 적 없는지, 그리고 누군가의 봄이 되여본 적 없는지 되묻게 된다. 두부공장 아주머니가 내게 남겨준 것은 단지 그해 겨울의 콕스가 아니라 이 세상에 여전히 살아있는 수많은 온기의 시작이였다. 사랑은 그렇게 기억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증식하며 결국엔 모두가 련결된 거대한 온기의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것 같다.

림순자 프로필
1959년 연길에서 출생.
연변작가협회 회원, 연변녀성문인협회 회원, 재한문인협회 리사.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