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꾜재판 현장(자료사진) /신화넷
1946년 5월 3일, 극동국제군사법정은 도꾜에서 일본 28명 갑급 전범에 대한 첫 공개재판을 진행했다. 2년여에 걸쳐 진행된 도꾜재판에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강력한 청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80년이 지난 지금, 백지흑자로 기록된 침략 범죄는 일본 우익 세력에 의해 조금씩 희석되거나 미화되고 있다. 일본군국주의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고 이 또한 이미 우려스러운 현실
적 위기로 되였다.
일본 전범, 력사의 오명을 영원히 짊어지다
1946년 5월 3일, 중국, 미국, 영국, 쏘련, 프랑스, 오스트랄리아, 화란, 필리핀 등 11개국의 법관, 검찰관으로 구성된 극동국제군사법정은 도꾜에서 첫 공개재판을 진행했다. 법정은 침략전쟁을 기획·발동·집행한 지도적 책임이 있는 갑급 전범을 재판했으며 중국, 미국, 영국, 쏘련 등 각국은 대규모 학대, 전쟁포로 및 민간인 학살 등을 구체적으로 실행한 을·병급 전범을 각자 재판했다.법정에서 내각 총리이며 륙군 대장이였던 ‘전쟁광인’ 도조 히데키(东条英机), 남경대학살 주범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9.18사변 주모자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일본 침략전쟁 최고 스파이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贤二), 중국 멸망을 위한 ‘히로타 3원칙’(广田三原则)을 제안한 전임 일본 수상 히로타 고키(广田弘毅), ‘먄마 학살자’(缅甸屠夫)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郎), 일본 ‘파쑈의 아버지’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등 28명 갑급 전범은 례외없이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정의는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2년여의 재판 끝에 2명이 병사하고 1명이 정신이상인 외 나머지 25명 피고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중 도조 히데키, 마쓰이 이와네, 도이하라 겐지 등 7명 전범은 교수형에 처해졌다.“도꾜재판은 력사상 시간이 가장 길고 규모가 가장 큰 국제재판이였다. 총 818회의 재판이 열렸고 4,336건의 증거가 접수되였으며 419명의 증인이 법정에 출석해 증언하고 779명이 서면 증언을 했다. 재판 기록은 4만 8,412페지에 달하며 판결문은 1,231페지에 이른다.” 화동정법대학 교수 관건강은 “도꾜재판은 〈까히라선언〉, 〈포츠담선언〉, 〈일본항복서〉 및 이를 바탕으로 제정된 〈극동국제군사법정 헌장〉 등 문서를 엄격히 준수했는바 철석같은 증거로 이들 전범의 루적된 범죄를 립증한 것이지 일본 우익의 주장처럼 ‘전승국이 패전국을 재판한 것’이 절대 아니다.”고 말했다.“도꾜재판은 국제적으로 처음으로 ‘반평화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인정하여 침략전쟁을 기획·발동·집행한 행위를 범죄로 정의하고 개인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밝혔다. ‘반평화죄’의 정의는 〈유엔헌장〉 조항의 초안 작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뉘른베르크(纽伦堡)재판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후의 국제질서를 공동으로 확립하고 새로운 세계대전의 발발을 방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화동사범대학 정치학 및 국제관계학 교수 조지프 그레고리 머호니는 이렇게 말했다.일본 근대사 학자이자 상해교통대학 부연구원인 이시다 다카시는 도꾜재판에는 몇가지 중요한 의제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일본군 전쟁 범죄의 시작점을 1941년에 발발한 태평양전쟁이 아닌, 1928년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작한 황고툰사건으로 확정한 점이다. 둘째는 남경대학살이 독립된 사건으로 재판되여 일본군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이와 함께 ‘극동 3대 전쟁 폭행’으로 불리는 ‘바탄(巴丹) 죽음의 행군’, ‘먄마 죽음의 철도’ 등 참극도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1946년 3월, 중국 검찰관 향철준, 미국 검찰관 모로, 부검찰관 새턴, 고문 추사오창으로 구성된 국제검찰국은 중국에서 일본군 범죄를 조사했다. 그들이 작성한 〈중국보고서〉는 중국침략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한 남경대학살, 세균전, 중국인에게 아편 재배 강요 등 범죄를 상세히 폭로했다. 그들은 또 관련 증인을 도꾜로 불러 증언하게 함으로써 도꾜재판을 철석같이 확고한 증거 기록으로 만드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도꾜재판 이전에는 일본 민중들이 전시 통제의 영향으로 남경대학살 등 력사적 진실을 알지 못했다. 바로 재판을 통해 남경대학살의 진실이 완전히 밝혀진 것이다. 일본 민중들이 침략전쟁의 실상과 일본군의 만행을 알게 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일본 메이지대학 객좌연구원 가케후시 쓰요시가 말했다.
미국의 비호로 인한 불철저한 청산
도꾜재판 현장(자료사진) /신화넷
“도꾜재판은 중요한 력사적 공헌이 있지만 완벽하지 않은 점도 있다.” 이시다는 “도꾜재판 후반기 미국은 랭전과 자국의 정치적 필요로 국제 법정의 업무를 서둘러 종료했다. 일본군이 중국 전장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세균전을 자행하고 항일근거지에서 ‘3광’ 소탕 작전을 펼치고 중국 전쟁포로와 민간인을 강제로 랍치하여 로동력을 착취한 등 많은 범죄를 완전히 추궁하지 않았다.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 이시와라 간지(石原莞尔), 일본 관동군 방역급수부대(731부대) 두목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등도 청산과 처벌을 피해갔다. 이로 인해 일본내 일부 우익 세력은 심리적으로 안심하게 되였고 일본군국주의가 재연될 여지를 남겼다.”고 말했다.머호니는 “도꾜재판에서는 전쟁 통수 책임이 있는 히로히토(裕仁) 천황을 재판하지 않았고 초기 조선반도(1910년 이후)와 대만지역(1895년 이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도 간과되였다. 대외침략에 참여한 많은 일본 문관들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는 전후 아시아 질서에 잠재적 위험을 남겼다.”고 말했다.1948년 12월 23일 새벽, 도조 히데키,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 7명 갑급 전범은 도꾜 스가모(巢鸭)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등 많은 중요한 전범들은 다음날 스가모감옥에서 석방되거나 감형되였다.1952년, 일본이 법적으로 국가주권을 회복했을 때 “일본정부는 전쟁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은 점령 기간의 불가피한 산물일 뿐 진정한 의미의 범죄자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즉 일본은 처음부터 도꾜재판의 결과를 부인한 것이다.” 이시다가 말했다.이후 일부 전범들은 다시 관직에 복귀했고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수상이 되였다. 그는 재임중 대만을 방문하고 장개석을 지지하여 ‘대륙 반격’을 부추겼다. 1964년, 그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가 일본 수상이 되여 계속해서 우익 보수 로선을 따랐다. 1971년에는 미국과 〈 류큐제도(琉球诸岛)및 다이토제도(大东诸岛)에 관한 일본국과 미합중국간의협정〉을 체결하여 류큐제도의 행정 관할권을 일본에 귀속시켰다. 또한 1971년에는 일본 전범을 수용했던 스가모감옥이 철거되고 력사적 흔적이 전혀 없는 상업 복합 단지 ‘태양성’으로 재건되였다.이시다는 “‘후세에 일본의 침략 력사를 알리지 않겠다’, ‘후세대가 선조들의 죄를 짊어지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 일본 우익이 받드는 리념이다. 스가모감옥을 철거한 것은 바로 력사적 유적지를 완전히 없애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국제재판을 받았으며 갑급 전범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추악한 력사를 은페하려는 것이다. ‘태양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마도 일본 국기와 관련이 있는데 태양이 떠오르고 일본이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의미를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이 60층 높이의 건물은 완공 당시 아시아 최고층 건물로 되여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 모였다. 그리고 높은 ‘태양성’ 아래에는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일본의 죄악의 력사가 가려져있다.
군국주의 그림자 부활에 경계해야
“력사적 유적지를 철거하는 것이 조용한 태도 표명이라면 1978년 갑급 전범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한 것은 도꾜재판과 국제 공리에 대한 일본 우익 세력의 공공연한 도전이다. 관건강은 “일본 우익 분자들은 일부러 〈중일 평화 우호 조약〉 발효 직전에 갑급 전범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했다. 이는 평화 조약을 통해 일본에 대한 중국의 추궁을 완전히 포기시키고 ‘정상 국가’가 되려는 일본의 망상을 은연중에 담고 있다.”고 말했다.오늘날 야스쿠니신사의 유슈칸(游就馆)내에는 남경대학살을 부인하고 황고툰사건과 로구교사건을 외곡하는 전시물이 명백히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외곡은 당시 일본 전범들이 도꾜재판 법정에서 한 말과 완전히 일치하다. “도꾜재판에서 일본 전범들의 외곡된 력사관이 바로 ‘야스쿠니력사관‘의 근원이다.” 이시다는 그 핵심을 찔렀다.수년 동안 일본 우익 세력은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활동을 통해 군국주의 전범들에 대한 숭배를 끊임없이 표현해오면서 력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도꾜재판의 판결을 뒤집으려 하는 등 재심을 바라는 일본 전범들의 야망을 로골적으로 드러냈다. 수십년 동안 그들은 력사교과서를 조직적으로 외곡하고 학생과 자위대원을 야스쿠니신사에 ‘견학’시키며 세뇌하면서 침략 력사를 은페해왔다.2024년에는 일본 해상자위대 퇴역 장교 오쓰카 히데오가 야스쿠니신사의 궁지(宫司, 최고 책임자)로 취임했다. 이후 전 륙상자위대 막료장 히바코 요시후미가 야스쿠니신사의 의사 결정 기구 핵심 멤버로 취임했다. 그는 공공연히 “야스쿠니신사는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며 자위대원은 ‘전사’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다카이치 사나에가 일본 수상이 된 이후 일본은 군비 강화의 길을 더욱 빠르게 달리고 있다. 방위 예산을 대폭 증가하고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며 ‘비핵 3원칙‘을 느슨하게 하고 살상무기 수출 금지를 해제하는 등 일련의 행동으로 지역 긴장을 계속 고조시키고 있다. 일본 자위대 간부 무라타 고타가 중국대사관에 란입하고 자위대 함정이 대만해협에 나타나는 등 악의적인 도발 행위가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일본은 또 자위대 ‘계급’ 명칭을 개정하여 제2차 세계대전 결속전 일본군의 ‘대장’, ‘대좌’ 호칭을 되돌리겠다고 선언했다. 일련의 조치는 일본군국주의 그림자를 완전히 부활시키려는 다카이치 내각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가케후시 쓰요시는 “군국주의 사상으로 자위대를 재무장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이 매우 뚜렷해졌다. 문관 통치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나는 현재의 일본 자위대가 더 이상 문관 통치를 받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제2차 세계대전을 돌아보면 일본은 군대가 ‘폭주’하고 문관의 통치를 받지 않게 된 후 완전히 군국주의의 길을 걸었다. 그 교훈은 바로 코앞에 있다. 외면해서는 안된다. 침략을 미화하고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력사의 심판대에 다시 세워질 것이다./신화넷
编辑:박명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