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대표에서 마을의 버팀목으로, 장춘시 쌍양구 평호가두 신양촌당지부 서기 박기운

촌민들의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선 신양촌당지부 서기 박기운
“우리 신양촌 촌민은 모두 내 가족”
“수술은 위험하고, 서명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장춘시 쌍양구 평호가두 신양촌당지부 서기 박기운(52세)은 보호자가 없는 촌민 정명화(郑明花)의 수술동의서에 두차례나 서명했다.
2022년 섣달 그믐날, 정명화 로인이 갑자기 쓰러져 긴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였다. 의료진으로부터 수술이 시급하다는 판단을 전달받았고 수술의 위험성과 서명의 책임에 대한 의사의 엄중한 경고에도 박기운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다. 3년후, 정명화가 다시 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그는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치료비를 마련하고 수술실 문앞에서 간절히 기다리던 박기운은 또 한번 가족을 대신해 서명했다. 간호사가 보호자를 찾을 때마다 선뜻 나서는 그의 모습에 병원 관계자들은 “저 분이 진짜 가족이겠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그는 관을 모시고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목숨이 걸린 문제에는 제가 책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을 촌민은 모두 내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최근 기자에게 이같이 말하는 그의 눈가에는 여전히 그때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배여있었다.

고향마을 촌민의 부름에 서슴치 않고 귀향한 박기운 서기
“고향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저는 돌아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016년, 13년간 기업 대표로 활동하던 박기운은 촌민들의 간절한 부름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이끌려 신양촌으로 돌아왔다. 당시 마을은 외상채무에 시달렸고 인구는 줄어들어 활력을 잃은 상태였다. 기업 경영에서 쌓은 경험은 마을 재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사업을 기획하는 데 든든한 밑거름이 되였다.
“예전에 아이들이 뛰놀던 길과 이웃들의 웃음소리가 생생히 떠올랐습니다. 그런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의 귀향은 쉽지 않은 결정이였지만 가족의 리해와 지지가 그에게 큰 힘이 되였다.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촌당지부 서기로서의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당의 부름이였고 촌민들의 믿음이였습니다. 그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죠.”
마을로 돌아온 그의 첫번째 과제는 마을 재정을 바로잡는 것이였다. 외상채무를 하나씩 해결한 뒤, 본격적으로 마을의 터전을 다지는 기초작업에 착수했다. 도로정비와 가로등 설치 등 사업을 추진하며 촌민들을 참여시켜 일자리를 제공했고 참여자에게는 상응한 수고비를 지급해 사업추진과 촌민소득 증대를 동시에 이루었다.
기초작업의 성과가 토대가 되면서 마을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500그루의 나무를 심고 과수재배를 장려한 노력은 농가 소득증대로 이어졌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외지에 나가있던 촌민들이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박기운은 “현재 4~5가구가 귀향했고 래년에도 비슷한 규모의 귀향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현재 신양촌에는 60여가구가 정착하며 박기운이 부임할 때에 비해 인구가 늘어났고 환경도 눈에 띄게 개선되였다. 그는 “기반시설이 잘 건설된 다른 마을들에 비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조금씩 진전을 이루고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촌민들 갈등 해소에 법보다는 '마음'을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사업의 결과가 아니였다. 박기운의 인생철학인 ‘함께 살아가는 마음’이 마을의 새로운 기반이 되였다. 그의 ‘립장을 바꾸어 생각하기’ 원칙은 먼저 촌간부들 사이에 뿌리내렸다. 그는 간부들에게 늘 이 원칙을 강조하며 스스로 화합의 모범을 보였다. 그 결과 간부들이 먼저 하나로 뭉쳤고 이 협력과 신뢰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현재 신양촌에서는 ‘마을을 나쁘다고 말하는 촌민이 단 한사람도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단합된 정신이 확고히 자리잡았다.
이같은 단합정신은 민감한 갈등 해소에서도 례외는 없었다. 박기운은 촌민 사이에 모순이나 갈등이 발생하면 법을 앞세우기보다는 ‘마음으로 중재’하는 방식을 고집한다. 그는 스스로를 심판관이 아닌 중재인이라 여기며 “서로의 사정과 감정을 먼저 리해시키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두 집 모두를 배려하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그의 목표는 어느 일방의 승패도 아닌 “모든 방법을 동원해 두 집과 마을 전체에 평화를 찾아주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보증금 분쟁, 이웃 간 토지문제, 가족 간 다툼 등 다양한 갈등에서 효과를 보였다. 그는 “법보다 먼저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로 인해 오히려 문제 해결 후 관계가 더 돈독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말썽을 해결해준 두 집에서 나중에 과일을 사가지고 촌민위원회를 찾아오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의 봉사는 특별한 순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전기료금 납부, 약 심부름, 가전제품 수리, 사회보험, 토지 민원 등 촌민들의 일상적인 어려움까지 꼼꼼히 챙겼다. 그는 “촌민들의 불편함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태도는 군대에서 터득한 봉사정신과 당의 교육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며 “군 복무 시절부터 대중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이 저의 마음속에 뿌리내렸습니다. 옳바른 사상이 있다면 해결책은 무궁무진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해결사 역할을 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자식이 부모를 돌보듯 한 믿음과 따뜻함을 마을에 전하고 있다.

박기운이 촌간부들과 사업토론을 하고 있다.
“경제 발전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양촌은 116가구 중 7~8가구를 제외하고는 전부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이곳에서 박기운은 외지로 나간 자녀들에게 “타국타향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잊지 말라”고 조심스럽게 당부한다.
명절이면 전통문화 행사로 어르신들에게 위로와 활력을 선사하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과이다. 3.8절, 단오이나 추석 명절이 되면 촌민위원회 마당에 모인 촌민들을 위해 장기자랑과 전통 춤 공연이 펼쳐진다. “어르신들이 익숙한 노래와 춤으로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그의 미래 계획은 명확하다. 당건설을 선도로 촌의 집체경제 발전을 촉진할 계획이 명확하다. 현재 사슴사육장과 특산품가공장 설계를 계획하고 있으며 관광자원을 활용한 생태마을 조성을 구상하고 있다. 또한 전통문화와 효(孝) 정신의 계승을 중시하며 가정 내 효도문화 확산을 꾸준히 추진할 예정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경제 발전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과 문화가 살아있어야 진정한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기운은 신양촌의 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으로 ‘촌민에 대한 믿음’을 꼽았다. “촌민들이 나의 힘입니다. 그들을 다른 촌 촌민들 못지 않게 건강하고 행복하고 부유하게 생활하도록 하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그는 고향마을을 지키고 더욱 빛내기 위한 려정이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길림신문 오건기자
编辑:유경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