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시 쌍양구에 위치한 작은 마을 방가촌은 13년전까지만 해도 흙먼지 흩날리는 비포장도로에 단조로운 산업구조 등 제한으로 발전이 시급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였다. 10여년의 발전을 거쳐 현재는 넓은 아스팔트도로가 촌민들의 집앞까지 이어졌으며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가운데 식품가공공장에서는 기계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지며 활력이 넘치는 새농촌의 그림이 펼쳐지고 있다.
이 모든 변화의 뒤면에는 13년간 이곳에 뿌리내린 타향인이자 헌신적으로 직책을 다하는 조선족 기층 인대대표 김대환(55세)의 증언과 추진력이 숨어있다.
한줄기 희망으로 된 농촌도로
2012년, 김대환은 장춘 시내에서 방가촌으로 호구까지 옮기면서 이 곳에 투자하여 정착하려고 마음먹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사실 많이 뒤처진 곳이였지요. 지금 여러분이 들어온 이 좋은 포장도로도 당시에는 흙길에 불과했죠.” 김대환은 그때를 회억하며 기자 일행에게 이같이 말했다.
그는 당시 저수지와 맞닿은 이 땅에 주목하여 높은 수준의 조선족양로원을 세우고자 하는 꿈을 품고 있었다. 도시에 사는 자녀들이 주말에 찾아와 부모와 함께 터밭을 가꾸는 전원생활의 양로원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최초의 구상은 잠시 접어두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방가툰에서의 몇년간의 노력이 현지 정부와 인민들의 인정을 받아 2016년에 쌍양구 인대대표로 당선되였다. 신분의 변화는 개인 사업에 대한 그의 고민을 방가촌의 발전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였다.
김대환은 이곳의 발전을 가로막는 첫번재 장벽이 교통문제라는 것을 인츰 발견했다.
“부자가 되려면 길부터 내라는 옛말이 바로 이곳의 살아있는 현실이였어오. 사실 이 도로는 A급 이상 관광지의 진입로입니다. 도로가 없으면 관광산업을 발전시킬 수 없지요. 예전에는 그나마 있는 흙길마저 대형 차량들에 짓눌리면서 울퉁불퉁해져 관광객들이 자가용을 운전하고 오면 항상 차 섀시(底盘)가 긁히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당시 방가촌에는 두개의 광산기업이 있었다. 기업의 운송 수요와 촌민들의 일상적인 출행 및 촌의 미래 발전을 위해서도 제대로 된 도로는 반드시 필요했다. 인대대표로 선거되자 그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우선 두 광산기업을 찾아가서 3자가 힘을 합쳐 정부에 도로건설을 건의했다.
“우리 세 기업과 정부가 함께 자금을 모았습니다. 우리 기업측에서 60만원을 냈고 정부에서 50만원을 지원해 드디어 이 아스팔드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도로 공사과정에서 그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촌민들에게 무상으로 도로 확장을 위한 부지를 양보해줄 것을 설득했고 촌민들 역시 “다년간 기다려왔다.”는 마음으로 하나같이 협조했다.
지금은 이 도로가 방가촌 발전의 ‘대동맥’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김대환이 기층 인대대표로 방가촌을 위해 이룬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성과가 되였다.
길이 열리자 산업이 흥성해지기 시작
길이 열리자 방가촌의 잠자고 있던 잠재력이 순간적으로 서서히 깨여나기 시작했다. 방가촌은 예로부터 꽃사슴을 양식하는 전통이 있어 ‘꽃사슴 고장’으로 유명했다. 거의 집집마다 꽃사슴을 몇마리, 몇십마리씩 키우고 있었다. 현재 방가촌의 꽃사슴 사육수는 근 5,000마리에 달한다.
예전에는 꽃사슴 제품을 판매하는 데 주로 전통적인 경로에 의존했다. 하지만 도로가 생기자 김대환은 자신의 인맥과 자원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촌민들을 위해 고객을 소개하고 록용과 같은 특산품의 판매경로를 넓혀주었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록용은 원생태 제품이라 가격이 대형 류통시장보다는 조금 비싼 편이지만 고객들은 여기서 사는 게 진짜 값어치를 한다고 일치하게 생각하고 있지요.”고 김대환은 설명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방가촌의 꽃사슴 관련 제품들이 점차 시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반을 굳혔다.
이와 동시에 향촌관광의 작은 불씨도 방가촌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김대환은 방가촌에 ‘향양원농장’을 건설하고 저수지 자원을 활용하여 낚시터를 만들어 많은 낚시애호가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많을 때는 우리‘향양원농장’에만 년간 근 1만명의 관광객을 접대했습니다. 비록 최근년간 다른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관광사업이 일시 중단했지만 가장 많을 때는 하루에 1,000명까지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관광객이 늘어나자 촌민들은 집에서 키운 채소와 토닭알 등을 내다 팔 수 있게 되였습니다. 비록 많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용돈벌이는 할 수 있게 되였죠.”
방가촌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경제활동은 촌민들의 소득을 늘여가는 계기가 되였다.
산업구조 조정을 통한 도약
성장발전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김대환 개인의 사업도 험난한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그는 초창기의 양로산업에서 그후 농업분야에 전향했지만 “5년간 농사를 지어본 결과 투자 대비 수익이 너무 낮았습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성공 사례 기업들을 견학하고 꾸준히 연구한 끝에 산업간 융합을 통해 순환구조를 구축해야만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9년, 김대환은 조선족 전통식품의 시장 경쟁력을 알아보고 과감히 투자에 나섰다.
“원래 보유하고 있던 설비들을 모두 자동화, 스마트화 설비로 교체했습니다. 따라서 생산원가가 절감되고 리익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김대환은 ‘향양원농장’외에도 또 떡가공공장까지 세워 조선족 전통 음식인 떡을 새로운 사업 중심으로 육성하고 있다. 한층 나아가 김대환은 제품의 심층 가공과 제품의 다양화에 초점을 두고 조선족음식을 랭동식품으로 개발했다.
“길림성의 우수한 입쌀과 찹쌀을 활용해 더 다양한 신제품을 개발한 것이죠. 길림입쌀은 품질이 아주 뛰여나 조선족음식의 가공에 아주 적합합니다.”
현재 그의 공장은 년간 2,000톤의 현지 입쌀을 떡으로 가공하여 판매하고 있으며 입쌀의 부가가치를 크게 향상시키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다해
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김대환은 이 땅과 이웃들에게 보답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의 식품공장에는 방가촌 촌민 19명이 월 평균 3,500원씩 받으며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년간 연인수로 근 1,000명에게 계절별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소득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면모도 바꾸어놓았다.
“처음에는 촌민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촌민들이 작업복도 깨끗하게 차려입고 매일 샤와도 하면서 위생습관과 정신면모가 한층 좋아졌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꾸준하게 공익행사를 이어왔다. 매번 명절이면 방가촌의 로인들에게 입쌀, 식용유 등 생활필수품을 증정했을뿐더러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를 비롯한 길림성내 여러 조선족로인협회 및 조선족녀성협회 등 사회단체들이 조직한 여러 가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회사에서 생산판매하는 식품을 기부해왔다.
그는 “자그마한 성의라도 표현하고 싶을 뿐”이라며 꾸준히 사회에 베풀고 있다.
향촌진흥을 위해 그리는 청사진
김대환은 방가촌을 위해 하나의 청사진을 구상하고 있다.
“촌과의 협력을 강화하여 친환경 사육 및 유기비료 가공, 옥수수와 입쌀 심층 가공 그리고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무첨가식품과 랭동제품을 생산하여 여러 산업이 상호 융합되는 산업사슬을 구축하여 방가촌의 경제발전을 이끌어‘일촌일품(一村一品)’을 실현하고 싶습니다.”고 포부를 전했다.
/길림신문 정현관, 오건, 리미연, 김령 기자
编辑:유경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