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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 로인녀성

로인절 맞아 더 그리운 아버지의 말없는 사랑

오건      발표시간: 2025-08-15 08:55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석양이 더욱 붉어지는 8월을 맞이하면 나는 몰래 부모님 생각에 빠지곤 한다. 지금 생전이면 이 딸이 로인절을 더욱 즐겁게 쇠여드렸을 텐데...

지난 세기 60년대, 내가 소학생이던 때 아버지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에서 과장으로 근무했다. 단정한 외모의 미남이였지만 말수가 무척 적었다. 

어머니는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는데 우리 삼남매를 홀로 돌보느라 분주했다. 새벽부터 풍로불을 지피고 점심 도시락을 싸고 막내아들을 업고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였다. 일요일은 휴식이 아닌 대청소와 빨래, 장보는 날이였다. 어머니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분이였다. 반면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손님’ 같았다. 하루종일 아버지의 말 한마디 듣지 못하는 날도 있었고 칭찬도 꾸지람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안겨본 기억도 없다. 특히 외출이 잦아서 이불짐을 메고 나갈 때마다 ‘농촌으로 가시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가방만 들고 떠나면 ‘먼 곳으로 가시는구나’라고 판단했다. 

외할아버지와 부모, 두 남동생과 함께 찍은 김순희(앞줄 오른쪽)의 가족사진  

그때는 아버지를 ‘일만 하는 사람’, ‘온전히 인민을 위하는 간부’라고 여겼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한 할머니를 모시고 오셨다. 아버지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총각 동료의 어머니였다. 급에서 총각에게 대학 추천 기회를 주었는데 본인이 대학에 가면 동생의 학비를 마련해줄 수 없다는 생각에 이 기회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에 아버지는 “이 좋은 기회에 꼭 대학에 가거라. 동생 학비는 내가 책임지고 매달 대주마."라고 그 총각에게 약속했다. 결국 두 형제는 모두 대학에 갔고 아버지는 매달 월급을 받자마자 우정국에 달려가 두 형제의 학비를 보내주셨다. 이 일은 한동안 비밀로 해왔지만 어느날 할머니가 주정부에 찾아와 허리 굽혀 인사하며 아버지에게 감사를 표하여서야 동료들이 모두 알게 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때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셔서 잘 대해주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하셨다. 그 후에도 생활이 곤란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아버지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1974년, 중학교 졸업후 농촌으로 내려갔으나 전에 앓던 병이 발작해 '쓸모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당시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농촌생활은 필수였는데 나는 그 무대에서 스스로 밀려나야만 했다. 무직자 신분으로 매일 눈물로 보내던 어느날, 한 친척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지식청년 배치업무를 담당하는 아버지의 지인을 통해 시내 전근을 부탁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밭고랑에 머리를 묻고 일하더라도 리상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목표가 있으면 꼭 길이 나진다."라고 강직하게 말씀하시며 그 친척의 청구를 거절하셨다.

아버지가 무심코 던진 그 말 한마디가 나를 '악몽'같은 현실에서 깨워줄 줄은 몰랐다. 비록 중병으로 쓰러져가는 나에게 한 말은 아니였지만 그속에서 한줄기 빛을 보았다. “나도 목표가 있어야 한다. 체력로동이 안되면 뇌력로동으로 길을 찾자!”고 나는 다짐했다.

며칠 고민 끝에 영어를 목표로 삼기로 했다. 공부라면 자신이 있었고 영어를 전공하면 꼭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날 저녁, 영어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부모님께 털어놓았다. 두 분은 깜짝 놀라셨는데 평소 말수가 적던 아버지께서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왜 영어를 배우려 하니? 일본어를 배운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데.” 젊은 시절 일본류학을 갔다온 아버지의 말씀이였다. “아니예요. 꼭 영어를 배우겠어요.”라고 내가 단호히 답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날 우리 집은 모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하지만 당시 연변에는 영어 교과서도, 학교도 없었다. 결심은 확고했으나 환경이 따라주지 않았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련속 두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모두 쇠약한 나의 모습을 보고 단연 거절했다. ‘곁에서 쓰러질가 봐’ 걱정했을 것이다. 좌절해 주저앉아 있을 때 어머니가 낡은 중학교 영어 교과서와 레코드판 한세트를 구해왔다. 

독학은 고통의 련속이였다. 밤에는 이불 밑에서 레코드를 돌리고 무더운 여름에는 문을 잠그고 커튼을 쳐놓고 땀에 온몸을 적셔가며 ‘지하 공부’를 했다. 영어 자모와 발음을 익히고 교과서를 암송하며 구절마다 분석했으며 밤을 새워 공부하다 쓰러질 때도 있었지만 끈질기게 견지하여 단어를 정확히 읽고 쓸 수 있었다. 운 좋게 어법책을 빌릴 수 있었고 연변의학원 박옥인선생님의 소개로 리금자 영어 선생님을 만나 실력이 급성장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습관이 바뀌였다. 아침 출근하실 때는 공부하는 나를 위해 커텐을 쳐놓고 가셨고 무더운 여름엔 시원한 웃방을 나에게 양보해주셨다. 평소 즐겨 듣던 라지오도 내가 공부할 때에는 절대 켜지 않고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내가 공부하다 잠들어 있으면 항상 포근한 이불이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분명 아버지가 나를 안아 눕혀주신 것이다. 그때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온다.

영어 실력이 늘고 몸도 점차 회복되였다. 약도 줄였고 위궤양으로 죽도 먹지 못하던 내가 옥수수밥을 먹을 수 있게 되였다. 오로지 목표에 매진한 결과였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1977년, 연길시의 여러 중학교들에 영어과목이 신설되며 교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험장에는 나 혼자였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어엿한 연길시6중 영어교원으로 되였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그 다음날, 120원짜리 상해표 손목시계를 사오셨다. 당시 상해시계는 매우 구하기 어려웠고 특히 초침에 빨간점이 달린 건 희귀품이였다. 평소 60원짜리 낡은 시계를 차고 계신 아버지는 자랑과 기대가 가득찬 눈빛으로 말없이 딸을 바라보셨다. 

1979년, 나는 더 큰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다. 학교로 떠나기 전 아버지의 두번째 선물을 내놓으셨는데 바로 120원짜리 고가의 ‘벤또(便当, 도시락)' 록음기였다. 외국어 공부에 필요한, 꿈에도 갖고싶었던 것이였다. 천주머니에 넣어두고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기뻤지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후회가 가슴을 허빈다.

그후에도 나는 인생의 고비마다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신 진정한 가장이신 아버지의 현명한 판단에 탄복했다. 과묵한 아버지는 인생에는 고난이 많지만 옳바른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나아가면 반드시 광명이 있다는 것을 자식들에게 가르쳐주셨다.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과 빛나는 눈빛은 나에게 영원한 힘이 되여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1988년에 63세의 젊은 나이에 자식들 곁을 떠나셨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어머니와 함께 로인절을 편히 보내세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김순희

编辑:유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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